Tuesday, 28 April 2015

시로 화답하는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 노하덕칼럼

다시 찾은 유산
시로 화답하라

이는 주님의 명령이다.
그러나 시로 화답하는 신앙생활이 교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렇다고 대답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찬양으로 화답하여야 하는 줄로 아는 사람들도
감사함으로 화답하고 사는 사람들도
시로 화답하는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만큼 좋은 유산을 잃고 영적으로 가난한 삶을 산다.

이 글은 이에 대한 답을 찾아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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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5장을 펴시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what pleases the Lord?)
그것을 시험하여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찾아 내라(find out)는 명령이십니다.(10)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14)

세월을 아끼라.(16)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7)

저는 이 일련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질문을 만들어 봅니다.

잠자는 하덕아 깨어나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고 할 일이 있다.
주님께 기쁘게 할 것 무엇인지 아느냐?
세월을 아껴서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느냐?

네 주님,
‘술취하지 않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군요.(17)

그렇다
성령 충만을 받아서 뭐할래?
네 아버지가 네 주머니가 가득 돈을 채워줄 때 하고 싶은 일이 있듯이
하나님께서 성령 충만을 주실 때, 그때 너는 그 성령 충만으로 무엇을 할래?

그 다음 말씀(19-21)에
1]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
2]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20)
3]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21)
말씀하고 계시군요.

그렇습니다.
이 주님의 엄숙한 말씀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현대 교회는 찬송과 감사와 피차 복종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찬송과 감사와 피차 복종하는 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찬송과 감사와 피차 복종하는 일이 주님의 뜻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 더 자세히 본문을 살펴보면, 중요한 주님의 명령 한 가지를 묵살하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맨 먼저 나오는 말씀인데요.
‘시로 화답하라’는 말씀입니다.
찬송으로 화답하는 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성도는 우리 주변에 없습니다. 그러나 시로 화답하는 일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묻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 중요한 주님의 명령을 무시할 근거가 있는가 하구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 앞에 서면 간단히 말합니다.

시는 특별한 사람이 쓰는 문학장르입니다. 화니 크로스비 같은 시인이 쓰는 것이지요.
찬송가나 복음성가 는 그런 분들이 써놓은 시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것이구요.
우리는 그 찬송가와 복음성가로 열심히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시인을 특별한 존재로 구별하려 듭니다. 시에 대해 특별한 재능을 가져야 하고 훈련을 받아야 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일리는 있으나 진리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분업을 시켜 시인에게만 주신게 아니라 성령 충만한 모든 성도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찬송과 감사와 피차 복종하는 것이 성령 충만한 모든 성도의 마땅히 할 일인 것처럼, 시로 화답하는 일은 성령 충만한 모든 성도들에 있어 마땅히 순종해야 할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님, 나는 시에 은사가 없습니다.
주님 , 나는 시를 배운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피할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송명희 찬송시집 6의 겉 표지에 소개된 시(하나님께 감사하자) 한편을 소개합니다.

           우리에게 호흡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우리에게
감사를
주신
하나
님께
감사



이것이 특별한 재능이요, 시를 특별히 배운 사람의 시입니까?
제가 보기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령의 사람의 시입니다.

마치 주님, 저는 찬송과 감사에 은사가 없습니다.
찬송을 배우지 않았으니까 찬송하지 않겠습니다.
감사를 배운 적이 없으니 감사하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만큼이나 우수운 답변입니다.
시로 화답하는 일은 은사나 교육 문제가 아니고 순종이냐 불순종의 문제입니다.

화니 크로스비나 송명희 자매가 배워서 그런 시로 화답한 것이 아닙니다.
은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분들이요, 은혜 충만하여 이 말씀에 순종한 분들입니다.

시로 화답하는 일을 세상 사람들이나 하는 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사실 고대 소설들을 보면 선남선녀들이 시를 주고 받으면서 남녀간의 사랑과 친구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부분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시!’ 하면, ‘세속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시리 가시리잇고 바리고 가시리있고
날러는 어띠 살라하고 바리고 가시리있고
잡사와 두어리마난 선하면 아니올새라
셜온님 보내옵니니 가시난닷 도셔 오소셔

시는 이런 내용이나 담아야 어울리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시에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 시로 화답하는 기능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제 친구목사님을 따라 겨울산장을 따라 잠깐 다녀 왔습니다.
겨울 산장은 언제고 정취가 있습니다. 그 산장 주인이 어느 성도가 남기고 간 시 한편을 보여주었습니다. 겨울 나목을 바라보며 쓴 시였습니다.

‘벗기워진 나목들이 추워보인다.   ….. 들먹이는 여인의 어깨처럼.
청단 홍단 비단옷 뉘 위해 벗어주고 새 옷 입힐 임 기다리는 그 마음 애절키만’

잘 썼습니다. 그런데 그 산장 여주인이 말합니다. 이 시가 너무 처량하다고 했습니다.
재능이 넘친 작품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신 분이 남기고 간 시로서는 참 아쉬움이 남는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그분은 아무래도 봄에 다시 오셔서 제 2편을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로 좀 가득 채워졌으면 합니다.
시가 세속적인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산장 여주인은 그분이 이렇게 처량한 시를 쓰게 된 까닭은 아마 이곳 이민 생활이 너무 고달픈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탁소 일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송명희 자매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의 처지가 고달프더라도 얼마든지 시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담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엄청난 장애와 아픔으로 한 평생을 보낸, 송명희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을 위하여
외아들을 제물로 삼으실 때

얼마나 아프실까
주님의 몸과 맘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어 제물이 되실 때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가슴은
독생자 주셨건만
인간들 부족하다고 원망할 때

얼마나 아프실까
주님의 심령은
자신을 주셨건만
사람들 부인하여 욕할 때

참 좋지요? 아픈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픔을 시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어요. 이런 시로 화답하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시는 사랑하는 사람이 쓰는 것입니다. 남녀간에 서로 사랑하는 감정이 일어나면 시로 화답합니다. 내가 시인이기 때문에 시를 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시를 쓰는 것입니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은 시를 씁니다. 자연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 밭엔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지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네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짓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노천명의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시를 씁니다. 친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연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시를 씁니다. 연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아가)

은사가 있느니 없느니 하는 화려한 핑게를 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는 시를 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시를 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해인 시인의 나팔꽃을 소개합니다.

햇살에 눈뜨는 나팔꽃처럼
나의 생애는
당신을 향해 열린
아침입니다.

신선한 뜨락에 피워올린
한 송이 소망 끝에
내 안에서 종을 치는
하나의 큰 이름은
언제나 당신입니다.

순명보다 원망을 드린
부끄러운 세월 앞에
애를 안고 이은 사랑

때가 되면
추억도 버리고 떠날
나는 한 송이 나팔꽃입니다.

우리가 시편을 열어보면, 이런 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다윗이 하나님을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확신합니다.
그의 많은 시들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시를 쓰기시작했습니다.

송명희 시인의 행복한 이유를 적어 봅니다.

내가 행복한 이유는
내게  재물이 많은 이유 아니오
주 내게 분깃된 이유 때문에

내가 행복한 이유는
내게 친구가 많은 이유 아니오
주 내게 친구된 이유 때문에

내가 행복한 이유는
내게 영광이 많은 이유 아니오
주 내게 기쁨된 이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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