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30 April 2015

그가 목회를 잠시 그만 둔 이유는! / 노하덕칼럼


           보기에 민망한 일들이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다.
           듣기에 민망한 말들이 여기저기 쏟아진다.
낯을 들고 다니기도 참으로 민망한 세상이다.
           그러나 민망한 일들을 민망히 여기는 사람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민망한' 일도 많고, 민망한 말도 많으나,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은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민망히 여기셨다고 말씀하신다.

바디메오와 같은 소경이 따라오면서 불쌍히 여기소서 외는 말을 들으셨을 때, 주님은 민망히 여기셨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이 할 수 있나이다 엎드린 문둥병자를 민망히 보셨다.
사랑하는 오빠를 죽음의 권세에 빼앗기고 슬퍼하는 나사로 누이들의 말을 주님께선 민망히 여기셨다.

영어 성경은 민망히 여기신다는 말씀을 'compassion'이란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요즈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을 제목과 주제로 다룬 멜 깁슨  감독의 영화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데, 그 수난(passion)이란 말은  주님께서 연약한 자와 고통을 함께 당하고 고통을 함께(com) 나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바디메오란 시각 장애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셨다. 
온 몸이 문드러진 문둥병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셨다.
무덤 속에 사랑하는 사람을 묻고 상실감에 우는 고통을 함께 나누셨다.


얼마 전에 우리 동족이 쓴 글에서 상당히 공감이 가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어떤 사람이 뜻밖의 사고로 시각 장애인이 되었다. 
얼마의 적응의 시간이 기간이 지나고 나서 누군가 물었다. 
"시각장애인이 되고 나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무엇이었나요?"
"건널목을 건너는 일이었습니다."
신호등에 파란 불이 켜질 때마다, 맞은 편으로 사람들이 건너가는 횡단보도,
그러나 건강한 사람이 부지런히 건너가야 겨우 건널 수 있을 만큼 시간을 주는 횡단보도,
그 횡단보도 건너는 일이 가장 괴롭다는 것이었다. 시각 장애를 가진 분들은 겨우 반쯤 건넜는데 벌써 빨간 불이 들어오고, 피할 길도 없고, 달릴 수도 없는 그들은 꼼짝 없이 빵빵거리는 크락숀과 욕하는 운전사들의 폭언과 저주를 뒤집어 쓰고 남은 길을 건너가야 하는 것이다. 장애인이나 노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그리운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장애인을 보실 때, 민망히 여기는 마음(compassion)을 가지고 계신다.

얼마 전 잘 나가전 목회를 중단한 목사님 한분이 Kittel이란 사람이 사전에서 본 이 민망히 여기는 마음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어린 새 한 마리가 찢겨 죽는 모습을 어미 새가 보았다. 처절하게 우는 그 어미 새를 잡아 그 창자를 해부해 보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어미새의 창자가 토막토막 나 있더란 것이다. 어린 새끼 새가 찢겨 죽는 모습을 모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자기 창자가 토막이 나도록 처절히 울었을까?

그는 목회를 그만 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며
그런 교인들의 고통을 보아도 이런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제 목회를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하기 민망한 말들을 스스럼 없이 쏟아내고, 
보기 민망한 일들을 주저하지 않고 행한다. 
듣기 민망한 말들을 희희낙낙 즐기며 듣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이 하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에 앞서서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compassion)을 갖고 계셨다.
당시 사람들은 소경을 보면서도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보았지만, 주님은 그를 민망히 여기셨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게 될 인물로 그를 만나셨다.
그가 장애인이 된 것은 그 자신이나 그 부모의 잘못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저 하심이라" 는 관점으로 그를 만나셨다.

이런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의 절정이 십자가 사랑이다. 

마음만 나누신 것이 아니라 몸으로 그 아픔을 나누신 사건이 십자가의 사랑이다.
우리가 죄로 인하여 지옥에서 당해야 마땅한 수난(The Passion)을 함께(com)하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고난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민망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할 고통을 함께 당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죄인의 눈물을  compassion하셨다.
십자가에서 민망히 여기셨다.


그 결과는

"곧 보게 되었더라"는 것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