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30 April 2015

참 이상한 헌금 / 노하덕칼럼


프랑스 어떤 교회에서 '선교의 날'을 정하고 헌금을 했다.
헌금자 중에는 놀랍게도 가난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끼어 있었다.
그것도 거금 27프랑이!

놀란 목사님은 소경 된 부인을 만나서 조용히 물었다.
"생활도 어려우신 걸로 아는데, 어떻게 그 많은 헌금을 하셨나요?"
"저에겐 물론 많은 액수이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절약할 수 없는 부분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
"네?"
"사람들은 저녁 등불을 켜는 데 한달 경비가 27프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소경인 저는 등을 켤 필요가 없쟎아요? 이렇게 헌금함으로 하나님 은혜에 보답하게 되었습니다. "

기독교 밖에 있는 분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헌금하는 부분이다.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을 믿으면 축복을 받는다네, 하는 분들 가운데도
헌금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눈빛이 변하는 경우가 있다.
거기에 '온전한'이란 수식어까지 붙어 '십일조'란 말이 성경에 적혀 있으니 속이 메스꺼울 법하다.

그러나 굳이 록펠러 같은 사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귀하게 애용하는 성경 말씀 가운데 말라기 3장 10절이 회자되고 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내 소득을 10으로 하면 그 중 1/10을 하나님을 위해 구별하여 바친다는 말이니
10/10을 쓰고도 늘 쪼들리는 삶의 나날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후하게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잘못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부담를 안고 있는 이 말씀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나님 백성의 혈관을 힘차게 돌고 있는 이유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역설만큼이나 성도들 삶에 열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 안에 이루신 의,
그 위에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그분의 사랑,
영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믿음

이런 축복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십일조가 더 이상 장식이 아니라 보석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후8:9)

은사 받은 분도 많고, 가진 것도 많은 고린도 교회가 건강을 잃고, 분쟁과 시기에 요동칠 때, 바울 사도께서 제시하신 처방이 바로 이 헌금이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

의도 신도 믿음도 빠진 종교인들의 외식적 십일조 생활을 통렬히 비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렇게 마치시고 계신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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