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27 April 2015

아름다운 만남을 위하여 / 노하덕칼럼


    만남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다. 며칠 전, 황 디모데 목사님을 만났다. 처음 목회지인데 그라고 어려움이 없었을까? 그러나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었던 우려를 잠재우고 한두 달이 아닌 수년 동안을 단 한번도 낯붉히지 않고 행복한 목회를 하고 계신다. 그 비밀을 함께 나누고 싶어 이 글을 쓴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선 학창 시절 교육 심리학 S교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림을 생각했다. 이 그림은 무엇입니까 하여 가만히 들여다보니 할머니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다른 학생이 이 그림은 할머니의 그림이 아니라 아름다운 여인의 그림이라고 했다. 그렇게 보니 정말 그랬다. 그림인데 할머니로 본 사람이 있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본 사람이 있다니. 할머니로 본 내 눈에도 아름다운 여인으로도 보인다니 참 유쾌한 일이었다.
           이어서 교수님께선 다른 그림 하나를 보여 주셨다. 이것은 무슨 그림입니까? 어떤 학생이 고대 신전의 아름다운 대리석 기둥이라고 대답했다. 다른 학생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는 얼굴이라고 했다. 똑 같은 그림이 신전 대리석 기둥으로 보이기도 하고, 두 사람의 마주보는 얼굴로 보일 수도 있었다.

           다음은 황목사님의 체험담이다. 교수님께서 글자판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글자판을 바라보던 어떤 학생이 'reality!'라고 읽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른 편에 있던 학생이 외쳤다.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fantasy!'라고! 두 사람은 서로 자기가 읽은 내용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팽팽한 자기 생각이 무성할 때, 교수님은 상대편에게 각도를 바꾸어 글자를 보여 준다. 놀랍게도 절대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 내용이 보인다. 각도를 바꾸어 보니 상대편이 말한 그 내용이 보였다. 'reality'로 읽었던 학생의 눈에 'fantasy'가 보였다. 'fantasy'로 읽었던 학생의 눈에 'reality'가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보기에 그렇게 옳다 확신되는 그 관점은 정말 늘 옳은가? 내가 느끼는 감정은 절대적일 수 있는가?  상대편이 본 관점은 무가치한 것인가? 그 사람 눈 높이에서 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보았는가? 어떤 사람이 틀린 지식을 가지고 강하게 주장할 때, 그 주장이 틀렸다고 매정하게 그를 무시해버릴 만큼 당신의 관점은 완벽한가?
           '저는 상대가 감당할만한 사람이라면 그 잘못된 관점과 지식을 시정해 줄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라면 그 사람의 자존심이 걸린, 그리고 그 사람을 지탱해주는 나와 다른 그 지식을 그냥 살려두기로 했습니다.'(황 디모데)
           한컴사전에서 '듣다'란 단어를 찾아본다. 'To hear; to listen'만 적혀 있는 게 아니다. 'to obey; to understand'로도 적혀 있다. 빌2장이 생각난다. 하나님이 몸을 비우셨다. 인간이 되셨다. 내려오셨다. understanding하셨다! 인간이 만날 수 있는 만큼 하나님은 키를 낮추셨다. 이 understanding 때문에, 예수님 앞에 누구나 올 수 있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사마리아 여인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여인도. 그들의 삶은 이내 예수님과의 공감대(empathy)를 형성하고, 말씀하시면 순종하는 것이다.  그들의 아픔은 이내 예수님의 눈물로 나타나고, 그래서 위로가 되고. 나와 여러모로 다른 점이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힘들어하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해법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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