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전도사로 처음 청빙한 교회는 프랑크푸르트 장로교회다.
주일 예배에 50명이 채 되지 않는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 예배와 교육이 내 몫이었다.
어느 남자 집사님이 조그만 매를 뒷짐에 들고 문 앞에 서서 어린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었다. 어른 예배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되겠고, 또 어린 아이들이 어른 보호도 없이 밖에 나 다니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이겠지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아이들에게 예배는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게 책정한 사례비는 매월 200마르크였는데, 당시 미화로 $100 조금 더 되는 돈이었던 것으로 생각이 든다. 그 교회까지 가는 차비(약 100Km)와 헌금을 제하고 나면 얼마가 남는지 몰랐다. 아무튼 나에겐 돈보다 나를 찾아와 불러 주신 일이 정말 고마웠다.
나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님 앞에 옳다함을 얻은 것만도 감사한데
그분의 포도원에서 마음껏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돈을 내고서라도 얻고 싶은 포도원이었다.
그런데 사례비까지 준다니 더욱 감사한 일이 아닌가?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간은 주일이 되어 교회에 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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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드리고 분반 성경공부를 하자면, 동역하는 교사가 필요했다.
찬양을 반주할 반주자가 필요했다.
길길이 뛰는예배에 길들여지지 않은 아이들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부모님들의 형력도 필요했다.
그러나 많지 않은 교인 가운데서 교사를 내려 보내달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도하기로 했다.
성범용 선생님 내외분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어학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만난 분인데, 처음이야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시간을 쪼갰지만, 이내 신앙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보은 선생님은 목사님의 따님이셨는데 피아노 반주는 물론 아이들에게 찬송을 능숙히 지도하는 훌률한 교사였다.
김지갑 선생님은 나와 같은 Giessen이란 도시의 대학 도서관에서 만난 분인데 겉모습의 우람함과는 달리 매우 자상하여 어린이 지도에 마음이 깊었다. 그분은 내 차가 없는 동안에 그 먼길 운전을 많이 해 주셨다.
교우들의 협력은 대단했다.
이런 교사들이 마음껏 봉사하도록 유지선 부장 집사님의 배려는 감동적이었다,
주일학교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끔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밤이 깊도록 나눈 우리의 모든 기도는 놀랍게도 바로바로 응답이 되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깨달은 사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아버지께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또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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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에게 많은 기쁨을 준 사건은 주일학교에서 당시 감비아로 선교차 떠나던 유병국 유보인 선교사를 후원하기로 한 일이다. 한 주일에 한번씩 금식을 해가면서 모은 돈을 선교지로 보낼 때의 기쁨은 참 컸다.
'김치하나도 포기 못한 선교사'란 책에 그분의 진솔한 성품과 사역이 소개되어 있거니와 유병국 선교사님을 그곳에서 만나고 그분의 선교에 동참하게 된 일로 인하여 우리 모두는 참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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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그때 시작된 유병국 선교사(지금은 10년 아프리카 사역을 마치고 한국 WEG지부장으로 계심)와의 만남을 축복하셔서 20년이 다 된 오늘까지도 계속하게 하시니 또한 감사하다.
우리는 기도만 하고 교육만 한것은 아니었다.
때로 우리는 서로를 초청하여 소풍을 나갔다.
유집사님은 그때도 굉장한 음식 솜씨로 우리를 놀라게 하였지만
그만한 수준을 넘나볼 수 없는 사람들도 없는 솜씨를 발휘하며 기쁨과 감사를 나누었다.
그 일로 인하여 또한 우리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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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했던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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