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28 April 2015

그리도 입고 싶었던 그 옷 / 노하덕칼럼


언젠가 고국에 가면 양화진에 가 보리라
몇년을 두고 벼르던 터였다.
내 민족을 위해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님들이 잠들어 있는 그 동산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그 중에도 꼭 보고 싶은 분의 묘지가 있었다.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

나는 그분의 비문 앞에 서서
99%의 순금 목거리를 생각했다.
14k 목거리만 몸에 걸어도 진짜 금목거리처럼 아름다운데
그의 삶을 읽었던 나에겐 순금목거리만 같았다.

그가 하나님께 맡은 지경,
평양에 전쟁이 왔다.
그리고
싸움이 끝난 지 3주가 지났어도
의사인 그의 일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아들 셔우드가 정말 보고 싶구나
그러나 너의 첫돌에도 난  서울에 갈 수 없다."

아빠가 부재 중인 서울의 가정에서는
첫 생일을 맞은 아기 셔우드 앞에 진기한 물건들이 놓여있었다.
조선의 풍속대로 아이가 평생의 직업을 선택하는 장면 연출이었다.
상징을 따라 누더기 인형(거지), 책(교사), 성경(목사), 괭이(농부), 청진기(의사)가 놓여졌다.
어린 아가는 어떤 물건을 잡을 것인가?
아기 셔우드는 꼬막 손으로 청진기의 고무호스를 잡았다.
사람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해피 버스데이'를 불렀다.

홀 선교사가 그렇게 보고 싶어했던
부인과 아들 곁에 도착했을 때
그의 온 몸은 중병에 걸려 있었다.

"건강할 때 돌아와 아내를 만나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병이 났을 때 집에 돌아와 눕는다는 게 얼마나 편한가를 알게 되었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구하러 자신을 불태우던 그는
더 이상 태울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끝냈다."

미국에서나 조선에서나 '아이들의 친구'였던 그는
하나뿐인 자신의 아들과는 말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영원한 작별을 고하려 하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부인에게 말하고자 애썼던 말은 이것이었다.

"내가 평양에 갔었던 것을 원망하지 마시오.
나는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이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소."

1894년 11월 24일, 석양이 물들 무렵
그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고요히 잠들었다.
아름다운 서울 한강변 양화진에 몸을 뉘었다.
영원한 안식일에 다시 깨어날 때까지 평안히 잠자기 위해

그는 자신의 껍질만 조선인에게 벗겨 준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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