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이 꿀을 찾아다니는 것처럼 나는 감동을 찾아다닌다.
신문을 볼 때도 어디 감동적인 이야기가 없나 두리번거린다.
정치란을 볼 때도, 사회면을 볼 때도, 하다못해 스포츠 면을 볼 때도 감동을 찾는다.
한 많은 압록강 두만강을 따라 여행하다 백두산 근처에 있는 어느 선교사님 댁에서 만찬을 하고 있을 때였다. TV를 통해 남북 정상의 만남이 중계되고 있었다. 그 선교사님은 그 뉴스를 보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나에게도 감동이 전달되어 왔다.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오르던 시절, 나는 감동으로 잠을 잘 수 없었다. 이국에서 태어난 아이를 태우고 '오, 필승 코레아!'를 외치며 거리를 채운 한국 촌 크리스티로 차를 몰고 나갔다. 축구를 해본 적도 구경한 적도 별로 없는 나에게 감동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나는 때로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때가 있는데, 그 작품 선정은 감동이 될만한 것이다. 한류열풍을 몰고 온다는 작품이 있으면 그런 작품을 찾아 볼 때가 있다. 대게는 그 안에 감동이 있다. 그래서 나는 감동이 되는 작품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헐고, 돈을 투자한다. 그리고 눈물을 산다.
그러나 대중이 환호하는 모든 작품이 나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친구'란 영화가 한국에서 800만 관객을 동원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놀랐다. 얼마나 좋은 영화였으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는가! 감동을 기대했다. 그리고 그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놀랐다. 도대체 이 영화의 무엇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움직였다는 말인가?. 나는 감동하고 싶었는데 감동할 수 없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살벌한 주먹세계 안에서도 얼마든지 감동이 있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영화를 보는 동안 감동을 끝내 찾지 못했다. 십여 년 전에 아카데미상에 빛나던 '대부'란 영화를 보고 실망했던 기억이 살아나는 듯했다.
나는 사람을 만나도 감동을 찾는 습관이 있다. 감동적인 사람을 만나면 너무 존경스럽고, 가슴이 뛴다. 기쁘다. 그냥 그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싶고, 적고 싶고, 자랑하고 싶어진다.
계화삼 목사님을 만나고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체험을 했다. 그 감동을 적어가다 '나그네 목사'란 책을 쓴 적도 었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김금주 권사님이나 이복진 집사님, 아직도 살아계시면서 감동을 주고 계시는 최화순 권사님이나 안흥규 장로님, 정재환 장로님 등, 이런 분을 만나고, 그들의 감동적인 삶을 적는 기쁨으로 나는 늘 행복하다.
하지만 나를 가장 감동시키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 어떤 감동도 하나님의 감동만은 못하다. 하나님을 만나고, 성경을 연구하며 너무 감동이 되어 목회의 길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 감동의 불은 아직 타오르고 있다.
나는 많은 신앙인들이 흘린 눈물의 양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토록 값진 눈물을 흘렸는가는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께는 정녕 놀라운 감동이 있으시다.
나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어떤 사람의 말에도 꿈적 않던 완고한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에 의해 움직였는가를 이해한다. 그 안엔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감동이 없이 헌신하지 않는다.
그분 안에 담긴 사랑, 그분의 생각, 그분의 행하시는 일, 하나 하나에 감동이 맺혀 있다.
*****
하나님의 감동이 그리울 때, 난 때로 누가복음 15장을 생각한다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나는 탕자가 되고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는 장면을 그리면서 성경을 본다.
아버지를 싫다고 뛰쳐나간 아들이 돌아온다.
아버지의 재산을 말아먹은 아들이 돌아온다.
젊음을 허랑 방탕하게 허비해버린 아들이 돌아온다.
정도에서 많이도 벗어나 죄의 길은 걷던 나도 그와 더불어 아버지 곁으로 돌아온다.
터덜거리며 힘없이 돌아오는 아들을 문밖에서 먼 발치로 바라보는 아버지 눈에 맺힌 눈물을 나는 본다.
주려 앙상한 아들을 안고 흐느끼는 아버지의 숨죽인 오열을 나는 듣는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는 이런 견딜 수 없는 감동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아들이 회개하였으니 아버지가 맞아들인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 아들이 회개하는 말을 듣기 전부터 아버지는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아버지는 상거가 먼 그 아들을 맞아들이기 위해 문 앞에 서 있다.
아버지는 이미 용서를 결심하고 있다.
그 아들을 기쁨으로 맞아들여 벌이는 잔칫상을 보라.
뼈 빠지게 일해온 맏아들은 구경조차 못하던 음식들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맏아들은 그를 용서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아들을 잃었다가 찾기까지는
누구도 돌아온 아들을 맞는 아버지의 감동을 모른다.
용서하기로 결심한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아이를 키우면서 하나님의 용서에 감동하였다.
나를 결심하고 고소하는 사탄은
외아들을 주시기까지 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결심을 이해할 수 없다.
*****
66권으로 이루어진 성경 가운데 처음 나오는 성경이 창세기다. 그 성경을 연구하고 나눌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수없이 감동한다.
창세기의 첫 장을 펼치면 '하나님'으로 가득하다. 구구절절 하나님으로 충만하다. 문장마다 하나님이 주인으로 계신다.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셔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지은 것이 하나도 그분 없이는 된 것이 없다. 하나님이 주인 되지 않으면, 문맥이 통하지 않는다.
사실 내 지난 날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없이 된 일이 없다.
지금도 하나님 없이는 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한 가지 미래에 대하여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하나님이 없이는 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성경을 기록하신 분은 하나님께 대하여 엄청나게 감동한 것이 틀림없다.
나같은 무감각한 자에게 까지 이런 감동이 밀려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부모님께 감동하는 자녀는 부모로 인해 행복하다.
부모님께 감동하지 못하는 자녀는 그로 인해 불행하다.
나는 내가 행복한 이유를 발견했다.
나에겐 하나님으로 인한 감동이 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없이는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이 한 가지도 존재할 수 없다! 과거의 나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계셨기에 있을 수 있었다!
지금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이 없이는 하나도 있을 수 없다! 앞으로 내 인생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 없이는 하나도 될 수 없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정말 감동적인 하나님이시다.
어떤 야구 선수의 기사를 읽으니
공이 잘 맞을 때는 공이 커 보인다.
좋은 사람에겐 일보다 하나님이 더 커 보인다.
예수님께서 일을 하기로 하셨다면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내셨을까?
그 능력 많으신 주님께서 바다를 움직이고
태산을 움직여서라도 크고 놀라운 일을 하셨을 게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놀라운 능력으로
많은 일에 매달리지 않으셨다.
오히려 작은 갈릴리 사람들을 일보다 더 크게 생각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허리에 수건을 두르셨다.
그러던 어느 날
세계를 뒤흔들 만큼 큰 로마제국이
하나님께 감동한 사람들에게 제국을 넘겨주었다.
너무 성공에 목줄을 매고 허둥대며 일을 쫓아가는
너 하나님의 사람아!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감동에 잠겨 보라.
네 곁에 신음하는 작은 영혼이 보이기까지.
그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분께 감동하여 보라.
창조의 주역이신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나는 나의 존재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우리 인간이란 하나님의 관리자란 사실을!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을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이는 나에게 자유함을 주었다.
지갑 속에 담긴 돈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 때, 나는 그 돈을 잘 관리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관리인일 뿐을 깨달았을 때, 감동이 왔다. 얼마나 내 마음이 자유한지 모른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 실감이 난다.
사춘기에 접어든 자녀로 인하여 때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없지는 않지만,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때, 나는 이 자녀의 청지기임을 인식할 때, 감동이 온다. 내 안엔 여유와 자유가 움튼다.
인류 역사엔 감동적인 인물이 많다.
그 중 가장 감동적인 한 사람을 말하라면 예수님을 첫 손가락에 꼽는다.
내가 예수님을 좋아하고 믿게 된 이면에는 그분의 감동적인 삶이 늘 자리잡고 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예수님 앞에 끌려 온 그 여인은 보지 않아도 너무 불쌍하다.
대낮 공중 장소에서 사람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눈만 끔벅거리며 교접하는 개에게도 차마 돌을 던지지는 않는 법인데, 사람들은 숨어 간음하는 사람을 찾아내어 돌을 던지려 한다.
사람이 그렇게까지 막갈 수 있나 싶어 가슴이 절인다.
그 짠한 여인은 영락없이 돌에 맞아 죽게 되었는데 ,
예수님께선 그 절박한 자리에 털썩 땅에 주저 않아 아래만 내려다보시며
그림인지 글씨인지 알 수 없는 내용만 땅에 그리고 계신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인을 돌로 치라 하였습니다'
돌을 쳐들고 길길이 뛰는 저들의 팔에서 힘을 빼버린 것은 더 강한 감동이었다.
누구도 말릴 수 없어 보이던 저 군중의 분노를 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렇게도 갈망하던 감동이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치라'
그렇다. 죄 없는 자가 어디 있어, 죄 가운데 뒹굴다 죄 가운데 잠들고, 죄 가운데 일어나 죄를 지으며 살다 죄 가운데 잠이 드는 중생들! 죄 없는 자가 어디 있어!
알고 있는 그들의 는 말씀은
이런 예수님을 보면서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 사랑의 훈풍이 나의 겨울을 녹이고
교인들은 교우들을 위해 그 깊은 밤을 지새우며 의 기도하는 목사의 모습 속에서 감동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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