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27 April 2015
인생은 이렇게 사는 거야 / 노하덕 칼럼
I.
희미한 글씨도 햇빛을 만나면 내용이 살아난다.
50대에 들어서니 눈이 어두워간다.
그러나 햇빛 앞에 서면 글씨가 정겹게 다가온다.
참 빛이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눈을 뜬다.
인생의 목적이 보인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보인다.
이웃이 보인다.
무엇보다 내 자신이 보인다.
사울이란 사람이 있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도록 선동하고
그 짓을 더 하려고 집집마다 기독교인을 이 잡듯이 잡아들이고,
그것도 부족하여 다메섹까지 달려가던 그 친구 말이다.
한 마디로 입맛 없는 친구였다.
출신이 좋으면 뭐하랴
배운 것도 많으면 뭐하랴
정말 입맛이 싹 가시고 말았는데
그런데 참 빛이신 예수님을 만난 후,
맛이 돌아오고 눈이 뜨였다.
고전 13장을 읽어보라.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의 송가를 읽은 적이 있는가?
가만히 헤아려 보면
맛만 돌아온 것이 아니다.
눈만 열린 게 아니다.
달려갈 길을 찾았고
생명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몸 던져 일할 사명을 찾았다.
아직도 입 맛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가?
아직도 눈이 감긴 강아지 같은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가?
참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라.
그분은 당신에게 줄 의미 있는 인생을 안고 문밖에 기다리고 계신다.
II
아무리 맛없는 무우도 소금이 뿌려지면 맛이 난다.
인류의 소금이신 예수님!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맛이 난다.
소금은 자신을 녹인다.
자신을 희생한다.
배추가 맛이 나는 까닭은 녹아드는 소금을 만났기 때문이다.
소금이 녹아서 배추 안에 스며들어갔기 때문이다.
배추 김치가 썩지 않고 겨울을 날 수 있는 까닭은 소금이 녹아졌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썩지 않고 있다면, 소금 같으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때문이다.
인류의 소금으로 녹아진 그분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녹여 영생의 길을 여셨다.
소금이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듯
이제 성도는 세상의 소금이다.
죄악이 확산되어 사회가 썩는 것을 막는다.
빛은 강할수록 그 빛을 만나는 대상을 환히 드러나게 한다.
빛은 온 세상을 환히 드러나게 한다.
그러나 정작 빛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빛이 없으면 세상은 깜깜하다.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는다.
무엇이 보인다는 것은 빛이 있다는 증거다.
당신의 모습이 이만큼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빛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은 철저하게도 남을 드러내는 이타적인 삶이셨다.
어떻게 베드로가 인류 역사의 위대한 등불이 될 수 있었는가?
그 안에 계신 참 빛 때문이다.
마치 한 자루의 양초가 자신의 몸을 녹여 빛을 발하고, 만나는 사람을 드러나게 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온 하나님의 자녀를 드러나게 하셨다.
예수님은 참빛으로 자신을 희생하셨지만, 그분을 영접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이것이 빛이신 하나님의 일이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그리스도의 빛이 그를 통하여 세상으로 나간다.
III.
욥바 교회엔 도르가라 하는 다비다란 여성도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은 바늘로 옷을 짓는 은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 바늘로 옷을 지어 선행과 구제를 계속하였다.
건강이 다하고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죽음을 맞는 날이 왔다.
그러나 죽음의 권세가 다비다의 선행과 구제를 넘을 수 없었다.
다비다는 선행과 구제로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를 만나는 순간 살아난다면 나는 빛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만나 달란트가 살고, 사명이 살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면 나는 빛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내는 복된 삶을 살면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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