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30 April 2015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어요 / 노하덕칼럼


손정숙 님의 수필집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7회 동계 올림픽 때 있었던 아이스댄싱의 이야기인데요.
영국의 제인 토빌과 크리스토퍼 딘이 한 조를 이루어 출전하여 동메달을 땄다는 이야기입니다.
뭐 그랬나 보다 했는데, 읽어가다보니 깨닫게 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19년간을 호흡을 맞추어 왔습니다. 아이스댄싱 부문에서 한물 간 나이로 취급당하는 36,35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10년 전, 그 분야에서 세계를 평정하여 금메달을 거머쥐었던 실력자들이고, 그날 누구보다 마음껏 묘기를 펼쳤습니다. 이를 본 그날 대부분 관중들이 그들의 실력에 매료되어 금메달 감으로 지목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동메달밖에 따지 못했느냐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지요.
그 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서로 떨어져 춤을 추던 이들이 다시 손을 잡은 것이 경기 규정시간 보다 1초가 늦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그 아름답고 완벽해 보인 아이스댄서들의 작품이 마주 잡아야 할 1초를 놓치게 되면 실점이 되는 모양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절묘한 하나님 백성의 법칙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아이스댄싱을 하는 한 팀일 수 있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역에서 일하시고,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대로 활동하는 영역이 있지만 서로 한 조가 되어 작품을 이루어 가는 아이스댄서로 비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들이 하는 일과 전혀 달라 보이지만 사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 성도를 염두에 두고 크고 비밀한 일을 행하시지요,
우리가 하나님과 한 조가 된 아이스댄서라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늘 초점을 맞추게 마련입니다. 그냥 춤추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모든 뜻에 나의 삶을 조화시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하나가 되어야 할 시간이 오면 우리는 서로를 향해 달려옵니다.
예배드리면서,
기도 가운데,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
찬양을 드리면서,
한 영혼을 구하는 선교 현장에서
1초를 놓치지 않겠다는 절박함으로
반드시 좋은 작품을 이루리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이스댄싱에 참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오라고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 때,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해 미끄러져 갑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아담을 향해 뻗으신 하나님의 손을 생각하면서.......    

세상일에 정신을 팔다가 가장 중요한 만남의 그 순간을 놓쳐버리면 안되니까요.

깨어짐의 영성 법칙 / 노하덕칼럼


존경받는 중세 수도사 한 사람이 젊은 수도사를 교육하고 있었습니다.
그 젊은 수도사에게는 아직 좀 시건방지고 교만한 구석이 남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바른 교육을 시킬까 노 수도사는 고심하면서 젊은 수도사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여기 물 좀 붓지"

딱딱하게 굳은 흙덩어리를 만지면서 말했습니다.
젊은 수도사는 길어 온 물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딱딱한 흙덩어리다 보니 물이 흙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옆으로 흘러내리고 맙니다.
"이런 딱딱한 흙덩어리는 물을 받지 못하네"
그는 옆에 있는 망치를 집어들더니 그 딱딱한 흙덩이를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가루가 되도록 흙덩어리를 잘게 부수었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물을 부어 보라고 합니다.
젊은 수도사가 부서져서 부드러워진 그 흙 속에 물을 붓습니다.
이내 그 물은 흙에 스며들고 흙을 축축이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그 수도사는 웃으면서 말합니다.

"여기다가 말이야.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겠지?

이것을 우리 수도하는 사람들은 깨어짐의 영성 법칙이라 말한다네."
(헨리 나우엔의 책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자녀로 택하신 하나님의 꿈은 '과실을 맺게하고 또 그의 과실이 항상 있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로 부름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열매맺는 삶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깨어지는 걸 싫어합니다.

자신의 철학과 경험, 자신이 쌓아올린 부와 명성,
이런 것들이 깨어지면 큰 일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들이 자기를 구원할 것으로 믿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구요.
자아가 깨어져 심령이 온유해진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는 기업을 약속하셨습니다.
열매를 맺게하십니다.


베드로는 깨어짐 속에서 예수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먼저, 자신이 께어져야할 죄인임을 인식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깨어진 베드로의 자아 위에 주님께서는 성령을 부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어주신 하나님의 물로 인하여 아름다운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베드로는 계속적으로 자아가 깨어졌습니다.
그리고 변화되어 갔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까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앞에서나 수많은 회중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까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
두려움은 사라져 갔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가 되기까지.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잠언 17:3

고통을 넘는 사랑 / 노하덕 칼럼


황병철님의 책을 읽다가 언뜻 깨달은 이야기인데요


하나

추운 북극이나 남극에 사는 펭귄은 아빠 펭귄의 발등에 알을 낳는답니다.
아빠 펭귄의 발등엔 털이 많이 나 있어서 알을 부화하기에 좋은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두 달 동안 아빠 펭귄의 발등에서 지내다 새끼가 부화되면 어미 펭귄은 먹이를 새끼에게 주어 키운답니다.
그때까지 쫄쫄 굶으면서도 새끼가 부화될 날을 기다리던 아빠 펭귄은 드디어 사명을 다 하고 바다로 향하는 중 대부분 아빠 펭귄들은 죽어간다는군요.
아,
너무 눈물겨운 이야기지요?

          그러나 저는 그보다 더 눈물겹고 감동이 있는 이야기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벗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벗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란 하나님의 자녀를 부화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십자가의 고통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의 작품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길 기다리신 것입니다.
참 추우셨을 텐데...   .
참 아프셨을 텐데....  .
참 고독하셨을 텐데...   .
마치 아빠 펭귄이 그 발등에 두 달 동안이나 알을 두고 기다린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극상품 열매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끊어지셨습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극상품 열매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겨울을 나셨습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극상품 열매를 이루기 위해 한 알의 밀 알로 썩어지셨습니다.

때로 나의 자아가 뭉개지는 고통을 당할 때,
우리 위해 짓이겨질 대로 짓이겨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토기장이는 잘게 빻아 체질한 흙을 물에 풀어 반죽합니다.
그런 다음 커다란 나무망치로 무수히 흙반죽을 내리칩니다.
그렇게 하면 흙 속의 공기가 빠집니다.
흙과 흙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고 흙은 엉겨붙어 차지게 됩니다.
그래서 많이 짓이겨진 한 흙일수록 좋은 토기의 재료가 됩니다.

구두 수선공의 망치아래 좋은 가죽이 무두질을 당하듯
그래야 털이 뽑히고 기름이 온전히 처리되듯
양질의 철들이 대장장이에게 뭇매를 맞듯
소제가 고운 가루로 빻아질 때 제물이 되듯

그러고 보면,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란
좋은 자기로 빚어져 가는 반죽 과정일 수 있습니다.
맹렬히 돌아가는 녹로 위에서 살점이 뜯겨 나가는 그 현장일 수도 있습니다.
온몸이 빨갛게 달궈져 가는 가마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프고 어지럽습니다.
뜨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통하여 지금보다 훨씬 쓸모 있고 아름다운 존재로 세상에 나타납니다.
꼭 필요한 존재, 유익한 존재로 세상에 나타납니다.

우리 주님께서 전능자의 채찍을 대신 받으시고 대신 고난을 당하신 겨울을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사랑하나 봅니다.

대신 고통을 받으신 그분으로 인하여 / 노하덕칼럼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일입니다. 영국 군함이 파손되어 물에 뛰어든 병사 한 명이 간신히 널판 하나를 붙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는 자기와 같이 수영을 잘하지 못하는 병사 하나가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동료에게 널빤지를 붙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널빤지는 너무 작아서 두 병사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채 자꾸만 가라앉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동려에게 널빤지를 내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아무쪼록 살아서 돌아가시오."

동료 병사는 극구 사양했습니다.

"아니오.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이니 천국에 가겠지만, 당신은 아직 믿지 않은 모양이니 살아서 예수님을 믿고 준비하여 천국에서 만납시다."

그는 널빤지를 놓고 물에 가라앉았습니다.
동료는 널빤지를 붙들고 헤엄을 쳐서 나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사실을 전해주었습니다.

만일 널빤지를 넘겨받아 목숨을 건진 그 사람이 자신이 잘한 공로가 있어서 살아난 것처럼 말하고 다닌다면 나쁜 놈입니다.
자기를 대신해서 죽어간 그 한 사람의 사랑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는 나쁜 놈입니다.
그는 다만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일뿐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가 이런 사랑을 입었다고 전해도 자랑할 것은 없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당연한 일을 하였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 -

인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어떤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인도에는 좋은 신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 할아버지는 담담히 대답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나를 위해 죽은 분은 없다오"


- 둘 -

램브란트란 화가는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모습을 색채로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군중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불현듯 그는 그 군중 속에 자신을 그려넣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못박았구나. 내가 이 악한 일에 동참하였구나."


- 셋 -

헨델은 어느날 이사야 53장을 읽어갔습니다.
고난당하시고 영광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의 영혼을 뒤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조용히 '그 메시아'를 그의 악보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발견된 그의 악보는 눈물 자욱으로 얼룩져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 넷 -

스펄젼은 1868년 10월 4일 주일 설교에 이런 내용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내려친 채찍은 로마 병정들의 것이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전 인류에게 내려치신 채찍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그의 몸과 영혼으로 가로막아 대신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몇년 후,
이런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반드시 치료받아야 할 질병으로 여기십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로 영적 질병이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치료제를 장만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란 말씀은
너무 가슴 아프고
하지만
너무나 기쁨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그 치료약은 효과가 즉각적이고 완벽합니다.
그 기이한 치료약을 병자들에게 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 다섯 -

14년 전에 어머니를 잃은 한 선원이 런던 바오로 성당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낭독하고 있었습니다.
칠년 후,
갑판 위를 오락가락하던 그 청년은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이 생각나서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어디서 이 말을 들었지?"
그러나 지금까지 40년을 살아왔지만  기도한 적이 없었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도 기도하지 않았다니.....    .'
성경이 있으면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그때, 20년 전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 유물이 떠올랐습니다.
허겁지겁 달려가 사물함을 휘젓던 손에
밑바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성경을 만났습니다


- 여섯 -

한 젊은 청년이 소책자를 나누어주려고 정박해 있는 배에 올랐습니다.
선상을 거닐고 있던 노신사 한 분이 기쁘게 그의 책을 받았습니다.

"식료품 가게의 포장지처럼 사용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르신!
버터나 치즈를 싸는데 성경의 책장들이 쓰일까 두려워서요."

노신사는 그 청년에게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었습니다.

"12년 전까지 나는 엄청난 골초였다네.
경건하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했네.
그러던 어느날 ,
나는 가게에 들러 담배를 사가지고 나왔는데
그 담배들은 성경 낱장으로 말려 있었다네.
나는 담배를 피우는 동안 그 담배 거죽을 보았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인으로 모셨다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빚진 자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제사장이 되었는데,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가신 그분께 감사하는 일은 지당합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요. / 노하덕칼럼


- 하나 -

빌라도는 당시 출세한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조건들을 많이 갖추고 있었습니다
권력이 있었습니다.
재력이 있었습니다.
무력이 있었습니다.
학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진정한 왕이 누구인가 알만한 사람이
죄 없으신 의인이라 그 아내까지 말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채찍과 십자가형에 넘겼습니다.
무엇인가 할 수 있었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빌라도
깨끗한 척 손만 씻고 서 있었습니다.
연약한 자매 마리아도
고난의 길로 떠나시는 주를 위해 옥합을 깨뜨리는데
주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아리마대 요셉은 전체를 걸고 주님의 몸을 무덤을 뉘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맺어져 있지 않은 빌라도
끈 없는 연처럼 버려집니다.
아무리 높이 날면 무엇합니까?
아무리 멀리 날면 무엇합니까?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하셨건만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그의 연이란
멀리멀리 날아가는 서글픈 이파리 같았습니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 둘 -

가룟 유다는 한 때 주님의 언약에 연결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높이 날았고
멀리 날 수 있었습니다.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주관이 뚜렷했습니다.
애국심도 살아있습니다.
수완도 있었습니다.
철학도 있었습니다.
재정관리에 능했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향한 열린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주님과 연결된 언약이 흔들리더니,
주님과의 언약이 얇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불던 어느 날
주님께서 그를 강하게 끌어당기던 성만찬의 밤,
그의 연은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멀리멀리 날아갔습니다.
위기는 얼마든지 전환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는 목을 주님께 바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식사기도가 끝나자마자
반찬이 이게 뭐야 투정하는 사람처럼
그는 소중한 인생을 쓰레기처럼 피 밭에 목메 달았습니다.
그리고 줄기로부터 끊어진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말라 비틀어졌습니다.
'한번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 셋 -

우리 고국 인기 드라마 가운데 '풀 하우스'란 문제작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부유한 청년이 가진 것 없고 집안도 없는 고아인 아가씨를 신부로 맞습니다.
계약결혼 형식으로.
침실만 따로 쓰는, 그러나 엄연히 결혼 반지까지 나눈 부부입니다.
그들은 결국 서로 반드시 있어야 할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정식으로 청혼, 부부가 되는 그런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에서 제가 유심히 보게 된 핵심 주제는 결혼반지입니다.
생활 중 중대한 고비를 만날 때면, 그들은 조용히 결혼 반지를 봅니다.
언약을 붙들고 기도하는 당신처럼!
그리고 힘을 얻습니다.
바람은 줄곧 불고 있었지만
결국 언약은 이루어집니다.



- 넷 -

오늘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언약 관계에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으로 맺어진 언약관계입니다.
'풀 하우스'의 주인공들이 언약의 반지를 나누고 온전한 결혼의 날을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는 약속을 가진 신부들입니다.
나의 연은 주님의 언약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습니까?
신랑 되신 그분이 오실 날이 가까운 이때
높이 나는 나의 연입니까?
멀리 나는 연입니까?
주님과 연결된 끈을 점검해 보고
굳건한 반석 되시니 그  언약 위에 다시 서는 오늘이 되시길!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
그날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시길!


새로운 약속 히브리서에는 이런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게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3:13-14)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히6:4f)

외로울 때, 곁에 계신 당신! / 노하덕칼럼


지선의 젊음은 술취한 운전사로 인하여 망가졌다.
아름다운 그의 외모는 치솟아 오른 불길 속에 연기와 함께 날아갔다.
그러나
깨어난 그의 곁에는 부모님이 계셨다.
자기 몸처럼 누이를 사랑하는 오빠도 있었다.
교우들이 그녀를 전보다 더 가까이 했다.
그 고통스런 수술은 끊임없이 되풀이되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
극한 고난 중에서도 가까이 다가온 사랑으로 인하여
이제
지선은 자신을 망가뜨린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고가 난 사실까지도 감사하면 산다.
그는 실패한 것 같았지만 승리하였다.

그러고 보면,
아픔의 순간에 곁을 지키는 건 천사다


아들 위로에게는 10년지기 친구가 있다.
어느 날, 그 친구에게 오해받을 만한 사건이 생겼다.
그런데 위로가 정색을 하며 말한다.
'아빠, 그게 왜 그 친구의 잘못이예요?'
누구도 그런 형편에 서면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하고
친구를 이해하고
친구를 변호하고
친구를 보호한다.
아들이지만 존경스런 마음이 든다.
위기를 당해보면 그 사람의 인품을 알게 마련인데
어려운 처지에 빠진 친구 곁에 서는 아들을 보며
참 뿌듯함을 느낀다.
그래, 그렇게 끝까지
위로자로 살아라.
친구를 이해하는 사람으로 그의 곁에 서라.


그러나 우리 주님이 외로우셨을 때는
아무도 그분 곁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뜨실 때는 그물과 아버지까지 버려두고 따르던 제자들도
정작 주님께서 지실 때는 모두 그분을 떠났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닙니다 고백하던 제자도 없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외치던 환호자들도 없었다.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예수님께는 베드로에게까지 흐르던 배신의 피가 많이 힘드셨을 게다.
본인은 인식조차 못하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주를 버리지 않을 줄로 아는
그 과신이 참 안타까웠을 것이다.
씨이저의 아픔은 정적들로부터 찔린 크고 작은 상처보다
사랑했던 브루터스 배신이었을 것이기에.

그러나
내가 아프고 외로울 때는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나를 위해 서 변호하시는
우리의 중보자!
나의 주님이시여!

온전히 맡기는 자가 받을 복 / 노하덕칼럼


           몇 주일 전 어떤 성도 한 분이 분재(Bonsai) 한 그루를 사무실 책상 위에 놓았습니다. 이틀에 한번씩만 물을 주고 가끔 햇볕을 쬐어주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일을 하려고 하니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물을 이틀에 한 번 준다고 하였지만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햇빛을 가끔 쪼여주라고 하였지만 몇 시간씩이나 비춰주어야 하는지 이런 일들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분재를 옆으로 옮기던 저는 질겁을 하였습니다. 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화초가 목마름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놀란 저는 그 화초를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화단에 놓았습니다.          
그날부터 화초를 키우는 주권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 이 화초를 살려주세요. 저는 어떻게 살릴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날로부터 화초를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때를 따라 비를 주셨습니다. 어떤 날은 폭우로 쏟아주시는 비가 너무 많게 느껴져서 뿌리가 썩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화초는 놀랍게도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보다 많은 새로운 잎들을 내고 있습니다.
           들에 나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키우신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확인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화초 한 그루라도 온전히 맡긴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음이 저려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