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6 May 2015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으리 / 노하덕칼럼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갈 때 슬퍼합니다.
사랑하는 분이 떠나간 임종의 자리가 더할 수 없이 슬픕니다.

지난주 그 동안 벼르던 영화를 한 편 보았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 '
이삿짐을 싸면서 시간도 아낄 겸사겸사 보던 중
일 손을 멈추게 하는 좋은 장면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여주인공의 수더분하고, 정감 있고, 자연스러운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신문을 보니까 그 여주인공이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리고 그 여주인공이 이은주란 사실도 알았습니다.
우울증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절통한 사정 때문에 세상을 떠나야 했는지 모르지만
저에게는 남은 자의 슬픔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녀의 부모님과 오빠가 참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그들은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던 가족이었는데.......   .
그런데 사랑하던 딸이, 사랑하던 누이가 그만 자결해 버린 것입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버린 것입니다.
남은 부모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남은 오빠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남은 자의 고통을  알았다면 그녀는 결단코 떠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에겐 한 꿈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야 부모가 다르고 형제 자매가 다르지만
영적인 아버지가 같으니
그 아버지 앞에서
같은 형제 자매로 만나
아버지의 사랑을 나누며 함께 살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형님일 수 있고
오라버니일 수 있고
아우일 수 있고
누이일 수 있지 않나요?

서로
아버지 앞에서 찬양도 하고
아버지 앞에서 정담도 나누고
아버지 앞에서 생활의 애환도 나누고
그렇게 살면 안되나요?

이렇게 생각하면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입니다.

언젠가 저는 아들 위로와 심각한 대화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내 말을 위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 정도를 서로 씨름하였습니다.
부자지간에 참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서로 통하지가 않았으니까요.
도무지 아빠의 말을 받아들이려고 하지를 않으니 어떡합니까?
그럼 내가 네 곁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 말하고 저는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위로가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대성통곡을 합니다.
자기 뜻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아, 아빠가 떠난다는 것은 아들에게 큰 아픔이 되는구나.
그 후로는 제가 떠난다는 말을 쉽게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 이런 말을 해주기로 다짐했습니다.
내가 너의 울타리가 되어주마!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겠다!

결코 떠나지 않으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잔인한 이별을 우리 생애에 지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결코 떠나지 않으시니까.
양을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께서는 결코 양을 떠나지 않으시니까.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 노하덕칼럼


예수님이 생각나는 소중한 아빠,
사랑해요. 주 안에서

건강하게 오래오래 제 마음 속에 있어 주세요.
저에게는 이미 잊혀질 수 없는 커다란 의미가 되었어요.
감사드려요.

자녀에게 그 아빠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기쁨입니다.
삶을 넉넉하게 하는 축복입니다.


저의 집, 장남 노위로 군이 ETOBICOKE SCHOOL OF THE ARTS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흔한 일이지만, 노위로에게는 엄청 큰 기쁨인가봐요. 여러모로 자신이 생각해 보아도 받아들여질 만한 무엇이 별로 없던 터라 더 기쁜 모양입니다.

'I'VE GOT IN!'

환호하며 온 방안을 돌고 돕니다.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기쁨입니다.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버린 헤롯을 아시지요?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차례 좋은 기회를 받았습니다.
일국을 받았습니다.
그 국가를 다스릴 왕권을 받았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과 같은 귀한 선지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선지자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분의 말이 옳은 줄을 알아 그 말을 달게 들었습니다.
그 말씀에 부합치 않은 자신을 보며 크게 번민하였습니다.
그의 일로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세례 요한의 목을 잘라버렸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었는데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를 잘라버렸습니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룰 수 있었는데, 세상 근심만 하다가 그 놀라운 기회를 날려버렸습니다. 그 질긴 욕심 때문에.
쥐꼬리만한 자기 의에 사로잡혀 탕자를 배척하던 그 형님처럼,
그 귀한 사람을 잘라버렸습니다.
속되고 깨끗치 아니한 물건을 먹지 않았다는 베드로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선물에 마음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내가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외아들을 주셨는데
내가 경건치 못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받아들이셨는데
연약한 걸 아시면서도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나를 받아들이셨는데,
성령이 친히 우리가 하나님 자녀임을 증거하시는데,
그리고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신다 약속하셨는데
나는 왜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지……..    .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작품이 생각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나도 그에게로 가서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을 받아들였을 때, 죽은 나사로는 무덤에서 나오고, 예수님은 부활과 생명이 되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그 집안에 모셔들었을 때, 죽은 어린 딸이 일어났고, 온 집안의 향기로운 꽃이 되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받아들였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님 나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임으로 어느날부터인가 사랑의 꽃, 희락의 꽃, 온유의 꽃, 감사의 꽃들이 내  화단에 피어나기 시작했던 것처럼
다가온 내 형제 자매를 받아들임으로, 그 형제자매가 내게 잊혀지지 않는 나의 꽃이 되길 바랍니다.

당신이 곁에 계시면 / 노하덕칼럼


내가 가진 한 가지 바램,
예수님을 한번 만나 뵈었으면 하는 소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많이 체험하며 살고 있으면서도
아직 예수님의 옷자락마저 뵙지 못한 채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2000년 전 나사렛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과 30년 가까이 같은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때로는 예수님과 함께 걸습니다.
때로는 예수님과 함께 일했습니다.
때로는 예수님과 함게 식사를 하였습니다.
때로는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했습니다.
때로는 예수님과 함께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직업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다 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 대하여 더 알고 싶은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다- 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그리고는 마음에 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 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기들 곁에서 청소년기간을 보냈다는 것만으로,
예수님을 다 알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혹시 자신의 교만이 아닐까요?

저는 제 아내와 25년을 함께 살았지만 제 아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다.
제 아들을 13년 이상 키웠지만 어떤 때는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특별하게 우둔한 사람이어서입니까?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사람의 한 길 마음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교회에 다닌지 45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 안다고 함부로 말해도 될까요?
저는 성경을 세상 어떤 책보다 많이 읽었고
신학도 부지런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다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는 정말 많은 것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안다.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를 세계적인 철학자이게 하는 명언입니다.

그러나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다는 교만 때문에
결국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옷깃만 만져도 나으리라는 12년간 혈루병든 여인에게 고침을 주신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죽은 딸을 달리다쿰 일으키신 주님께서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권능을 행할 수 없으셨습니다.

왜 내 삶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행하시지 않는 것일까?
의심하는 마음을 종종 만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오늘 날씨가 흐려 태양이 보이지 않지만 태양은 분명 구름 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안다는 나의 교만이 구름되어
오늘 하나님의 임재 체험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 안다는 나사렛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기적을 행하실 수 없으셨던 것처럼.
다 안다는 나의 교만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인숙 씨의 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나는 없어도 당신이 곁에 계시면
나는 언제나 있습니다.
나는 있어도 당신이 곁에 없으면
나는 언제나 없습니다.

겸손히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 들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너무 모릅니다.
내 눈을 열어 주님을 알려주세요.
더 깊이 더 많이 주님을 알기 원합니다.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봄은 오고 / 노하덕칼럼

엇그제가 입춘입니다.
영하 20도가 넘게 몰아치던 혹한이 수그러들고 있습니다.
벌써 온타리오 호수에는 얼음장 깨어지는 소리가 쩡쩡 울렸고,
호숫가를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던 얼음꽃들은 녹아내렸습니다.

야이로의 집에 영원할 것 같던 겨울이 녹아 봄날이 된 것처럼
우리의 겨울도 이미 기가 꺾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여,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이 때로는 우리에게 큰 고통을 주는 겨울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절망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야이로 회당장처럼 예수님을 찾아갑시다.
야이로 회당장처럼 예수님을 바라보고 엎드립시다.
야이로 회당장처럼 예수님께 많이 간구합시다.

우리의 소중한 존재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잠자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달리다쿰 부르시는 날이 오면
그는 일어나 우리 곁에 설 것입니다.
이전보다 훨씬 큰 기쁨으로 설 것입니다.

이 복된 믿음으로 겨울을 끝까지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주 밖에 없네 / 노하덕칼럼


어느날부터인가 저는
혈관이 무너져 내리는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제길을 걷던 피들은 길을 잃었고
여기 저기서 분노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어요.
더불어 살던 사회는 질서를 잃어버렸습니다.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 떠나고 떠났던
지난 12년의 세월,
그때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가져보았던 희망들은
자꾸만 바래져갔습니다.
재물은시간을 따라  바닥을 치는데
병은 조금도 차도가 없이 더욱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저의 가슴에는 절망이 아프게 응어리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에겐
거짓말 같은  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폭풍을 잔잔케 하신 분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케 하신 분
중풍병자에게 죄사함과 온전함을 주신 분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신 분

정말 놀라운 분에 관한 소문이었습니다.
들을수록 그 안에 생명이 있는 소문이었습니다.
그 소문은
어느덧 제 안에서 믿음으로 영글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으리라

그때 저ㅡㄴ
많고 많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그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아까운 피를 끊임없이 쏟으면서도
비록 수많은 사람들 중에 섞여  밀리고 밀리는 연약함 속에서도
영혼 깊은 곳까지 스며든 절망을 떨치며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그분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으리라

그분은 저의 마지막 소망이셨습니다.
그분의 눈빛을 뵙는 순간
어린 시절,
저의 새끼 손가락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애처러워
눈물 흘리시던 어머니의 눈이 생각났습니다.
그분은 제게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지만
저는 한 마음을 읽었습니다.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고된 일 하다가 힘을 얻으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 손 못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자국 만져라.

그분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나으리라

작았지만
정말 겨자씨만큼 작았지만
그것은 진실한 나의 믿음이었습니다.

감히 만질 수는 없는 그분을 향해
내밀어서는 안될 부정한 저의 손을 그분에게 뻗쳤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습니다.
아마 그분은 떨리는 나의 손끝을 느꼈을 겁니다.
저도 그 때 하나님의 임재란 말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요.

아,
그리고 네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무덤 앞의 커다란 돌처럼 막혀있던 혈관들이 열리고
피들은 힘차게 제 길을 따라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그분의 목소리였습니다.

이제
저는
노래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주 자비 강같이 흐르고
주 손길 치료하네
고통받는 자녀 품으시니 주밖에 없네"

그렇게 의사를 믿었었는데.......   .
돈이면 되는 줄 알았는데.......    .
아닌 건 아니었습니다.
그 어느 것도 나를 치료하지 못하였거든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자비의 강,
치료의 손길을 나에게 주신 주님 같은 분은 세상에 없습니다.
정말 주님 같으신 분은 세상에 없습니다.

저에겐 주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사막화를 막는 길 / 노하덕칼럼


지구가 사막화되고 있습니다.
사하라 사막 주변이 급속히 그 지경을 넓혀간다는 보도가 나옵니다.
요즘들어 더욱 극성을 부리는 중국의 황사현상도 지구의 사막화  일부라는 보도를 만납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인간성의 사막화 또한 심각해 보입니다. 6.25란 무서운 전쟁을 겪으면서도 피난민들을 따스하게 맞으며 이웃을 돌보며 국란을 극복하였던 인정어린 우리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신문들을 보면, 인성이 얼마나 무섭게 사막화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2005년 1월 24일자 조선일보 인터넷 신문을 보니 일면 톱 기사가 ‘신생아 청부납치, 친모는 살해’입니다. 다음 기사가 ‘20대 동거남녀 자신들의 아기 살인 유기’입니다. 부제가 ‘7개월 아기 버리고, 11개월 아들 버리고’입니다. 다음 날의 신문엔 이런 기사도 보입니다. '모시고 살기 싫다 노모와 이웃집 노파 살해!' 이렇게 인성이 사막화되어가는 것을 들으며 시106:15이 생각납니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현대인의 사막화된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5장은 영적 사막화로 인하여 고통받은 광인이 어떻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였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그 광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5:5:3-5)

광인은 귀신들린 자입니다.  그는 귀신에게 붙잡힌 후, 그 세력 안에서 자아를 상실한 사람이었습니다(W.Hendriksen).
그는 아주 난폭한 사람입니다.
포악하게 변하며 자기를 파괴합니다(5절).
소리지르고 자신을 상하게 합니다.
이 광인은 자기 사명을 상실하고 짐승처럼 사는 존재입니다.

다음은 제가 그 광인 입장에 서서 그 심정을 기록한 작품입니다.

저는 광인입니다.
저는 귀신들린 자입니다.
저는 귀신에게 인생을 점령당한 자입니다.
저는 무덤 사이에 버려진 자입니다.
저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내팽겨쳐진 자입니다.
저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죽어 가는 존재입니다.
저는 작은 자입니다.
저는 소외된 인생입니다.
그래서
저는 참 외롭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귀신들린 자라 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미친놈이라 손가락질합니다.
제 생각엔 그들이 나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한데
사람들은 저를 너무도 잘 아는 듯 말합니다.
제 생각엔 그들이 나에 대하여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 듯한데
사람들은 저를 너무도 잘 이해하는 듯 공언합니다.
그래서
저는 참 외롭습니다.


저도 누구에겐가 듣고 싶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저도 누구에겐가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그러나
아무도 저에게 다가와 사랑한다 말해주지 않습니다.
사랑을 확인해주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얼마나 사랑을 갈망하는지 알까요?
제가 얼마나 사랑이 필요한 존재인 줄 알까요?
그래서
저는 참 외롭습니다.

저도 모든 사람들처럼 손과 발이 자유롭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의 손과 발에 쇠사슬이 묶여 있어야 안심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제 손과 발에 쇠사슬 묶여 있음을 확인하려 할 뿐,
제 가슴에 채워져야 할 자유엔 무관심합니다.
저는 누구보다 자유가 필요한 자인데
사람들은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나를 생각하나봐요.
저도 사실은 자유인이고 싶은데
사람들은 저의 자유를 부자유스러워 합니다.
저의 자유함이 남을 부자유하게 하는 존재
그래서
저는 참 외롭습니다.

광인은 이로 인하여 무섭게 사막화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부모님은 자신의 생명 이상으로 그를 사랑하며 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를 이렇게 사막화시켰을까요.
성경은 귀신이 그를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령에 충만해야할 그가 귀신에 점령당했을 때, 그 인생은 이토록 비참하게 사막화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주고 받아야 할 사랑이 고갈됨으로 사막화됨을 느끼게 합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떤 고아 친구의 가슴에서 사막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가 특별히 누구보다 못먹고 못입은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의 가슴에는 황폐한 사막이 있었습니다.
부부간에 사랑이 없을 때, 가정이 사막화되어 갑니다.
교우간에 사랑과 이해가 부족할 때 교회가 사막화 되어갑니다.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광인은 사막화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그가 광인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현장에 예수님께서 사막화 된 광인을 찾아오셨습니다.  광풍을 헤치고 바다를 건너 광인을 찾아오셨습니다.
광인을 고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바꾸시려고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사막같은 그의 심령을 옥토로 바꾸시려고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사막화 되어가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사막화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주님께서 사막화되어가는 우리를 찾아오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와 인격적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귀신조차 모르게 그와 인격적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인을 찾아오셨을 때, 귀신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습니다(6,7절).
멀리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그런데 귀신은 예수님을 알았습니다(7절)
귀신같이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였습니다.
다만 귀신은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예수님을 인정하지만, 알고 있지만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는 갖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무관하게 사는 삶, 이것이 그를 사막화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아오시고 그와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2000마리의 돼지를 희생하면서 한 생명을 구하시고 그와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기까지 그의 사명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광인이 변하여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적 상황을 노래한듯한 찬양이 있습니다.

나는 길잃은 나그네였네
죄중에 방황하는데
사랑의 왕 내 목자 예수
나를 집으로 인도하네

사막화된 그의 인생을 회복하셔서 물댄 동산과 같이 넉넉한 삶으로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풍랑 속의 미소 / 노하덕칼럼

 
주님, 저는 흔들리고 있습니다.
바람 앞에 등불처럼.

주님, 저는 떨고 있습니다.
풍랑 속의 배처럼

바람을 만난 후
제 인생은 뿌리까지 요동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선 저의 내면에 계시나
저는 지금 흔들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선 제 안에 좌정하시나
제 영혼은 지금 떨고 있습니다.

주님,
이러다가 제 인생이 뒤집히는 걸까요?
가라앉는 걸까요?

주님
그래서 저는 두렵습니다.
노출된 저의 위험에 침묵하고 계시는
주님

제가 얼마나 아픈 걸 아시지요?
죽게 된 저의 고통을 보고 계시지요?
저의 침몰은  주님의 큰 관심사이시죠?


그때 저는 한 고요한 주님의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

바다를 향한 나무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군중을 향한 질책이 아니었습니다.
과거 어렸던 나를 향한 회개촉구도 아니었습니다.

보기는 보았으나 깨닫지 못하였고
듣기는 들었으나 이해하지 못하였던
눈멀고 귀가 막힌
저를 향한 주님의 통분이셨습니다.
주님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들랬던 저에 대한  꾸짖음이었습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나는 정말 알았어야 했습니다.
하늘과 바다와 땅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께서 누우신 배는 어떤 풍랑도 삼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님과 함께 풍랑 가운데 있는 것이
주님 없이 다른 어느 곳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는 제레미 테일러의 명언을!
주께서 나와 함께만 계시면
그분의 침묵 속에서도 나는 미소지을 수 있음을!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
주님은!
풍랑 속을 가는
제가 누릴 수 있는 위대한 안식이십니다

작은 존재 속의 천국 / 노하덕칼럼


           작은 존재라는 점이 부담스러운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들은 작다는 사실이 죄처럼 인식되는 문화구조를 가졌습니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부터 시작하여, 대교, 대로 등, 큰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나고 자랐습니다. 작은 나사를 빠뜨려 대교가 무너지는 참상을 당하면서도, 반도체 같은 작은 것들을 잘 만들어 부를 누리고 살면서도 큰 것을 좋아합니다. 지능이 높은 자가 낮은 자보다 우월한 세상, 가진 자가 가난한 자보다 가치 있게 대접을 받는 세상,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보다 평가받는 세상입니다. 큰 교회가 작은 교회보다 좋은 교회로 생각되고, 대기업 주식은 중소기업보다 높게 책정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작은 것을 귀히 여기십니다. 겨자씨는 참 작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겨자씨를 하나님 나라에 비유하십니다. 그            작은 것 속에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담아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 로마에 비유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작은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 중의 하나입니다.
우선 크기로 내놓을 것이 전혀 없습니다.
무게라야 1g이 되겠습니까? 직경이 1mm를 넘지 않습니다.
볼품이 없습니다.
톡톡 쏘고 맛도 없습니다. 혀끝만 얼얼하게 할뿐입니다.
먹음직하지 않고, 보암직하지 않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심겨지기만 하면, 달라집니다.
크기가 달라집니다.
보기가 달라집니다.
맛이 달라집니다.
그 씨 안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심히 미약한 식민지 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극히 약하고, 그 형제들 가운데서도 제일 작은 자였습니다. 겨자씨 같았습니다.
그러나 생명 되신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 오셔서, 그와 함께 하시니, 큰 용사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겨자씨 같이 작은 자라도 그 안에 생명만 있으면, 그리고 심겨질 수만 있으면 큰 용사일 수 있는 것입니다.

           겨자씨는 또한 자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작기 때문에 무시합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무시했습니다.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셉이 자랄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 안에 생명을 주시고 갈릴리 바닷가에 심으셨습니다. 그들은 겨자씨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자랐고 지금은 20억의 크리스챤으로 자랐습니다.
           세상은 겨자씨 같이 힘없는 여성들을 짓밟아 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나 사마리아 여인 같은 여성들까지도 큰 인물로 키워내셨습니다.            겨자씨 같이 톡톡 쏘고 맛없는 아내를 격려하고 은사를 살려주세요. 그들은 주님의 나라를 위한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겨자씨 같은 어린아이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같이 작은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나아 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겨자씨처럼 작은 어린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이 넘는 큰 무리를 먹이셨습니다. 겨자씨 같은 자녀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꿈을 주세요. 그 작은 자 안에 우리의 미래가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는 겨자씨처럼 작은 자녀들을 세계를 움직이는 인물들로 키웠습니다.
           바나바는 겨자씨 같이 겁 많고, 인내심 없는 마가 요한을 믿음의 거장으로 키웠습니다.

           겨자씨 같은 남편, 쫌씨 같이 작다고 무시하지 마세요.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기도와 헌신으로 키우세요. 그들은 큰 인물로 자랄 수 있습니다.             평강공주는 겨자씨 같이 작은 남편, 온달을 큰 사람으로 키웠습니다.

           세계 최상급의 목회자를 청빙하여다가 만신창이를 만들어 내보내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러나 겨자씨 같은 교역자를 맞아들여 거인을 만들어 가는 교회도 있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을 가졌더라도 그 믿음을 소중한 불씨처럼 생각할 일입니다. 그 작은 믿음을 불씨를 키우듯 지펴 가는 사람이 큰 일을 합니다. 큰 믿음 달라고 하나님께 너무 떼쓰지 마세요. 주님께서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더러 들리어 저 바다에 던지우라 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도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키워가시면 큰 산 같은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작은 겨자씨 속에 두신 천국 비밀입니다.

승리하는 삶이 그리우면 / 노하덕칼럼


저는 탁구를 잘 하지 못합니다.
우리 교회에 탁구를 하는 형제들이 있는데요,
그 중에 뒤에서 몇 번째에 저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합을 할 때면 이길 때가 많습니다.
제가 시합에 능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별로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제일 잘하는 사람과 짝을 지어주거든요.
그래서 웬만큼만 보조를 맞추면 곧잘 승리를 누리는 겁니다.
하하하!

새해가 되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승리를 기대하십니까?
정말 실력이 있는 분과 동역하시면 됩니다.
그런 분이 어디 있느냐구요?

천지를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동업을 하시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같은 분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함으로 가슴이 쓰라린
그런 아픔이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지요.
저는 노아를 묵상하면서
그는 바로 그런 사랑을 하였던 사람이란 생각을 했어요.
노아가 120년간 약속의 배를 지어갈 때, 얼마나 고독하였을까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렇게 외롭고 쓰라릴 수 없었겠다 싶어요.
그러나 노아는 그분을 끝까지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무섭던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날,

마음이 찢기도록 쓰리던 사랑은

단 열매로 나타났고
그는 그 무서운 심판 가운데서도 사랑하던 분의 손에 안길 수 있었습니다.
심판보다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러나 하나님을 가슴이 쓰리도록 사랑했던 의인은 오늘도 웃고 있네요.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승리하는 하루가 되시길!

신년을 맞는 기도시


주님,
하나님께서 손수 만들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선물로 주신
새해가 밝았습니다.

지난해도
세상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속에 저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금년도 우리 인생에 빛이 있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삶 위에 찾아오심으로 이곳엔 양지가 있습니다.

좋은 작품을 만든 공인이 그 작품을 만든 목적을 알 듯
우리를 지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해를 주신 목적도 아십니다.
우리에게 연한을 맡기신 주님께서
허락하신 연한을 어떻게 이루어드릴 수 있는지를 아십니다.

오늘도 지구는 주님께서 주신 법칙을 따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군요.
주님의 말씀을 따름으로 보시기에 좋은 삼라만상처럼
우리의 삶도 주님을 따라 돌아가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한 해
주의 말씀 따라 사는 인생 되게 하소서.


우리 자녀들이 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할 때,
부모 된 우리로 그의 아기 시절을 생각하게 하소서.
그저 누워 아무 일 하지 않아도 보기만 함으로 즐거웠던 그 마음이게 하소서.
하나님의 섭리 없이는 태어날 수 없었던 우리 자녀들이오니,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을 따라 사는 삶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뜻을 저들로 헤아리게 하시고
저들의 아픔도 하나님 신묘막측하신 계획의 한 부분이게 하소서.
주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사람이게 하소서.

공로는 잊혀지고,
기록은 깨어지고,
명성은 사라지고,
공은 잊혀집니다.*
주님,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게 하소서(엡5:17)


부모님께는 그 부모를 닮은 아기가 제일 사랑스러운 것처럼
하는 모든 일에서
삶의 다양한 모습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  하나님이 생각나는 성도이게 하소서.


진리에 순종함으로,
선교와 구제함으로,
서로 사랑함으로 ,
날이 더할수록 예수님을 더욱 닮아 가는 새해 되게 하소서.

* 제임스 돕슨

좋은 선물


성탄절이 오면
송구스러운 일이 있다.

예수님의 생신인데
내가 선물을 받는 것!

금년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분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정성껏 전해 준 선물을 보면서
자꾸만
'주님, 이걸 어떻게 제가 받습니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다.

예수님 때문에 형제되고 자매된 분들로 부터 받은 선물이니
참으로 감사한 것은 사실이나,
조그만 스위스 쵸콜렛 하나 정도라면
그래도 달콤함을 누리겠으나,
정성을 들인 선물이고 보면
'내가 오히려 드려야 할 마땅한 분들인데.........  .'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기조차 죄송스러운 것이다.

아무튼
' 감사합니다'
마음을 드리며
그 동안 빚진 분들,
나보다 더 필요한 분들을 생각하며
선물을 정리한다.

사실,
우리에겐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
그리고
주 안에서 형제되고 자매된,
당신이 바로 나에게 더할 수 없이 귀한 선물이다.

우리는 선물을 서로 나누지 않아도

서로가 존재한다는 것 만으로도 서로가 값진 선물

나 역시 당신에게 좋은 선물이 되고 싶다.
당신이 내게 좋은 선물인 것처럼.

미안합니다. / 노하덕칼럼


때로 이런 인사를 하는 분이 있다.

"목사님, 힘드시지요?"

목회다운 목회도 못하는 주제에 이런 인사까지 받는가 송구스러워
웃음으로 때운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서 힘든 줄 모르고 오늘까지 오고 있지만
내면을 들춰보면 목회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근자에 철없는 학생들 사이에서 없었으면 좋았을 불장난이 있었다.
심각한 소식을 듣고
그 학생의 부모님을 찾았다.
이런 심방이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지만,
어디 목회가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리고 종이 해야 할 일이라면 순종해야지.
99마리의 양을 두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선 그 발걸음이길 원했다.
자정이 가깝도록 그 가정의 신앙과 자녀 교육관과 이 사건에 대한 부모의 견해를 들었다.
담당 교역자와 부모님의 견해차가 하늘과 땅이었다.
그러나
교회와 부모와 학생이 서로 마음을 합하면,
이 정도의 불길은 넉넉히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청소년을 담당하는 교역자 입장에서 보면,
지도자의 좀 더 단호한 권징이 필요했다.
전체 학생들을 생각해야 하고, 피해를 입은 다른 아이들을 배려해야 하는 것 아닌가!
대충대충 시간만 때우는 사역자들도 없지 않은데 꼼꼼하게 챙기는 모습이 듬직하기도 했다.

결국,
나는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영 미안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잃은 양을 찾아오지도 못하고
99마리의 남은 양도 온전히 지키지도 못한 채
얼쩡쩡한 목자로
밤만 거의 꼬박 새워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얻은 응답은
'미안합니다!'

세상을 향해 나라고 할 말이야 없으련만
더구나
나는 성자도 아니고
아직도 내 의가 펄펄 끓고 있는 그리스도의 미완성 편지인지라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미안합니다란 말을 듣고 싶었지만

주님의 은혜가 너무 크게 밀려와
내 안에 미안한 마음이 조금씩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부끄러운 불장난이 일어난 것도
담임 목사로서의 내가 관리를 잘 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좀 더 깨어 기도하지 못한 내 탓입니다.
상한 사람들을 좀 더 강하게 싸 안고 눈물로 지도하지 못한 내 탓입니다.
좀 더 관용과 인내를 가지고 듣지 못한 내 탓입니다.'


몇 시간이 지나
이번 사건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찾아갔다.
"I'm sorry."
무조건 미안한 자가 되었다.
주님의 몸인 교회가 더 건강해질 수만 있다면
종이 못할 일이 어디 있으랴.

내가 미안한 것이 어디 이분에게 뿐이랴!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에게도  미안하고
가족에게도  미안하고 .
주님 앞에서는 날이 오면
'죄송합니다 주님'
이렇게 말씀드림 수밖에 없는 나인데.......    .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어가면서
어떤 사람이
"목사님, 힘드시지요?"
이런 인사를 하면
'미안하다는 말하기도 참 힘듭니다.'
이런 말들은 마음에 담아 놓은 채

그냥 웃는다.

목회다운 목회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이런 인사까지 받는 것이 송구스러워 .

성탄이 하나님께는 슬픔일 수 있다. / 노하덕칼럼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이다.

어느 날
지팡이처럼 의지가 되시던 아버님이 떠나시더니
몇 년이 못되어
나를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어머님이 떠나셨다.
그리고
5년 간격으로
큰 누님,
큰 형님 ,
작은 형님,
끝내는 나의 가장 가까운 후원자이시던
바로 손위의 누님마저 작년에 가셨다.

이는 가족일 뿐이지만
초등학교 시절 가장 가까운 친구도 떠나갔다.
감사절에 내가 보낸 편지를 가슴에 얹고
이삭이란 믿음의 친구도 떠나더니
최근에는
한달 전 나를 위해 날마다 기도해 주시던 양권사님께서 떠나가셨다.

꼭 저 먼 낙원으로 먼저 가신 분들 말고도
나와 좋은 만남 가운데서 사랑을 나누다가
이런 저런 사정으로 곁을 떠난 형제 자매까지 헤아리노라면
때로 가슴이 시리도록 아프다.

그래서일까?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말은 떠남이다.

2004년 전,
외아들을 말구유로 떠나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한다

우리가 이토록 가슴을 설레는
주님의 성탄은
하나님께는 슬픔일 수 있다.

나는 틀릴 수 있다 / 노하덕 칼럼


호숫가를 걷다 하이얀 물체 하나에 눈이 멎는다.
조그만 물새가 날아와 남기고 간 알 같기도 하고
어린이들이 볼에 물려도 맛있어 보이는 시리도록 흰 캔디(?)같기도 하고
반짝반짝 은빛나는 백설탕의 둥근 덩어리(?) 같기도 한,
그 무엇이라고 말해도 그렇구나 선뜻 받아 들
조약돌 하나를 손에 쥐어본다.

누군가
테임즈 강 가를 거닐다가
황금 빛이 나는 모양이 너무 아름다워
선뜻 집어 든 돌맹이!
솜덩어리처럼 가벼움에 황당했단다.
실상은 돌이 아니라 스폰지가 강물에 떠내려 오다
이리저리 돌맹이처럼 다지고 깎여
어엿이 돌의 행세를 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돌처럼 생겼어도 돌이 아니구나.
캔디처럼 보여도 캔디가 아니더니.....  .

이렇게 보면
사람들의 눈에 그런 것처럼 인식되는 일들이
그리고
눈에 보이는 걸 따라 이루어지는 판단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다.
더구나 그것이 인간 내면의 일에 있어서랴.

내가 보는 것들이
얼마든지 사실과 다를 수 있는데
나처럼 살지 않으니 악이다
독선을 갖고
때로는 정죄를 하고
살아온 나날이 얼마인가!

아메리카 땅에 도착한 백인들이 서부 신화를 이루었다고
환호하며 서부로 서부로 개척사를 써갔지만
완성된 책은 '원주민 멸망사'
뽑아내 버려야 할 잡초들로 생각한 인디언들은
사실 저들과 같은 심장을 가진 형제들!
햇살에 녹은 눈처럼 사라진 피만 스며든 그 자리에
교회당을 세우고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울리던 평화의 종소리!
그 아픈 십자가 첨탑이여!


이렇게 보면
사람들의 눈에 그런 것처럼 인식되는 일들이
그리고
눈에 보이는 걸 따라 이루어지는 판단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싶다.

주님 보시기에 좋은 일 / 노하덕 칼럼


           요즈음 시대는 내가 좋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시대입니다. 좋은 게 좋다! 남이야 죽거나 말거나 내가 좋으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로 넘치고 있는 시대입니다.
동성연애뿐만 아니라, 이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개인 이기주의가 이제는 집단 이기주의로까지 번져갑니다.

캐나다 M도시에서 목회 하시는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동성연애로 고통 당하는 가정이 있었습니다. 결혼하여 살면서도 남편이 동성을 너무 좋아합니다. 아내보다 훨씬 더 좋아합니다. 남편이 가정을 지키고 얼마동안 잘 사는가 싶다가도 좋은 상대만 나타나면 가정을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어느 날은 슈퍼에 장보러 가는 데, 아이를 딸려 보냈답니다. 아무리 동성이 좋기로 어린아이까지 어떻게 하랴 싶어서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이를 찾아가라는 전화였습니다. 좋은 동성을 만나자 아이를 슈퍼마켓에 혼자 두고 그 좋은 사람과 함께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동성을 좋아하는 그 형제의 형편을 다 이해해 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그러나 본인에게는 좋은 일일 수 있겠지만 내가 좋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정말 좋은 일이려면 그와 함께 살고 있는 아내와 그가 낳은 아이까지 좋을 때 좋은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정말 좋은 것입니다.

중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던 어떤 선생님께서 전해주신 이야기입니다. 그 선생님께서 가르치던  학급에 성적이 매우 우수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인가부터 그 모범적인 학생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수업 무시하고, 배우는 일을 거부하였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반항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망가져 갔습니다.
그 학생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던 선생님으로선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이 이 어린 학생을 망가뜨리고 있는가! 유심히 관찰하던 선생님은 그 부모가 별거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의 환경 조사란에서 그 부모의 종교가 기독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학생과 가정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별거중인 그 학생의 아버지와 어머니께 각기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들 성적 문제로 상의하고 싶다고.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 나타난 그 학생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를 보고 많이 당황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을 추진한 선생님께 대하여 무례하게 생각하는 듯,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정중히 양해를 구했습니다. 그 학생을 돕기 위한 부득이한 일어였다고. 그리고 준비해온 그 학생의  시험지를 아버지와 어머니께 보여드렸습니다.
영어시험지에는 답이 전혀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의미 없는 낙서만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험지 마지막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빠 엄마 나 누구하고 살아요? 이혼하면 누구하고 사느냐고요? 난 아빠 엄마 둘다 필요해요. 아빠 엄마 우리를 사랑해 주세요."
선생님은 자신도 기독교인임을 그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더불어 기도해도 되겠느냐고 여쭈었습니다. 기도를 마친 그 학생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온통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 가정은 새로운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일이 많습니다.
입맛에 좋은 음식도 많습니다.
몸에 잘 맞는 옷도 많습니다.
좋은 차도 많습니다.
좋은 집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좋은 것을 찾아 자신의 인생을 경주합니다.
그러나 이 좋은 일들이 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나 좋으면 동성끼리 좋아하겠습니까?
오즉 함께 살기가 힘들었으면 이혼을 하겠습니까!
더 이상 좋은 답이  없다고 생각이 되어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서로에게는 좋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가장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 자녀나 가정이나 공동체에 해가 된다면 좋은 일이 아닙니다.
그 당사자에게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못됩니다.

예수님께는 세상에서 좋은 일이 얼마든지 많이 있었지만 사람 살리는 일을 선택하셨습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몸을 찢기시고 창에 맞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일은 예수님 당사자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에 감당하셨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야! 좋은 일을 좇아가는 이 세상에서 나도 좋은 일을 좇아가는 인간 대열에 서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그리고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 좋은 일들을 접으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어느 학교 화장실에 누군가 의미 있는 낙서를 휘갈겨 놓았더랍니다.
"기억하라. 당신이 사색에 몰두해 있는 동안 밖에 있는 사람들은 사색이 되어간다."

좋은 게 좋은 일이라구요? 천만에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야 좋은 일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이 사실 좋은 일입니다.

쓰임 받을 때 / 노목사칼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저도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것이 참으로 기쁩니다. 온 우주의 창조주께서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기 원하신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거든요. 그래서 누가 저에게 설교나 원고를 부탁하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수락합니다.

큰 도움이 되고 싶으나
별 도움이 안되는 나를 안고 집에 돌아 오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 보기에 별 도움이 안되는 듯 싶으나
큰 도움이 되시는 분이시기에 주님께 맡기며 기도드립니다.

           그러나 지난 월요일의 부탁은 경우가 좀 달랐습니다. 노회 선교대회를 준비하시던 최목사님께서 저희 교회에 찬양을 5일 남겨두고 부탁했던 것입니다. 저로서는 역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찬양팀들이 많은데 하나님께서 금년에도 우리 교회 찬양팀을 사용하기 원하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였습니다. 너무 감격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찬양은 제가 하는 일도 아니고, 한두 사람이 올리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단순하게 '예!' 하고 감사할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제 한 사람이 감당할 분량을 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찬양을 담당하는 황집사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답은 간단했습니다.
           아래는 황집사님께서 제 전화를 받고 느낀 심경을 홈페이지에 올린 글입니다.

"우리 서머나 찬양대원들은 대단한 분들입니다.
지난 월요일 아침 목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을 때는 정말 난감하더군요.
작년에도 했고 지난 봄 부흥회 때도 섰는데, 이번에 그런 일이 있을까봐 미리 목사님께 우리는 안된다고 당부를 드렸고 개인적으로 몇 달 전부터 부부동반 모임이 약속되어 있어 시켜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받았을 때의 난감함이란... 저는 단호히 못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아무 준비도 없이, 대원들에게 어떻게 설득을 시키며...
그러나 묵묵히 일을 하다보니 자꾸만 그 일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의 잔치를 한다는데 왜 찬양 맡은 자들이 이럴 수가 있나 화가 났습니다. 마치 잔치를 배설해 놓고 포도주를 준비해 놓지 않은 것같아... 도저히 안되겠더군요.

저는 저의 약속을 포기했습니다. 저녁에 퇴근하여 정아영 총무님께 전화했습니다. 주님의 잔치에 우리가 필요하답니다. 정집사님은 흔쾌히 연락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모두 참석하겠다는 통보였습니다. 너무 기뻐 눈물이 핑 돌더군요. 사실 나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순종적인 대원들과 함께 한다는 게 너무 보람이 있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일입니다. 어떤 이는 맡은 일조차 못한다는데, 우린 아무 관계가 없으면서도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니까 무조건 헌신하겠다는데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일입니다.

우리는 많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단합하고 하나님의 영광이라면 언제 어느 곳이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용사들입니다.

다음 토요일 소망교회에서 울려퍼질 영광의 찬양을 기다립니다.
분명 모든 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돌립니다.

대원 여러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황집사님으로부터 감당하겠다는 전화를 받고 저 역시 기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일을 좋아하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저는 이번 일을 보면서 사무엘 상 18장에 등장하는 다윗을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매우 큰산 앞에 서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골리앗이란 큰산을 넘을 수 있었던 다윗이었지만 이번 사울왕의 요구는 너무 버거웠습니다.

                                   17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블레셋을 물리치겠다는 명분에, 사랑하는 자신의 딸까지 내놓고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며 다윗의 생명을 요구하는 왕에게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성경은 다윗의 충성을 간단히 적고 있습니다.

27 다윗이 일어나서 그 종자와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 양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께 드려

           다윗은 100개의 양피만 가져가도 넘을 수 있었던 산을 200개나 가져감으로 훌쩍 넘어버렸던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다윗의 진가가 더욱 빛난 것은 물론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리라.
         

동족 어린이들에게 필 꽃(시) /노하덕칼럼

나에게 하나님은 최고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계시는 곳도 최고
주시는 것도 최고
인도하는 길도 최고입니다.
결국 우리가 도착할 곳은 천국인데
그 나라도 최고입니다.

여러 분들이 저의 가는 길을 염려하십니다.
가는 나라가 염려된다
가는 시기가 염려된다
가는 환경이 염려된다
그래서 말리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저는 최고의 하나님 심부름꾼입니다.
최고의 하나님께서 최고로 사랑하시는 어린이들이고
저는 그들을 섬기는 일꾼입니다.
최고의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심부름이기에
최고의 하나님께서 최고의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꽃을 좋아하는 것처럼 저도 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중 좋아하는 꽃은 양귀비입니다
색깔이 선명해서 좋고,
피고 지는 멋이 좋고
배탈 난 사람들 몸 던져 살리는 헌신이 좋습니다.

어느 날 루크네 집에 들렀다
그 정원에 무성한 그 꽃을 보았어요.
잔디처럼 정원가득 자리 잡고 있었어요.
저는 그 꽃 몇 그루를 얻어 우리 교회와 집 화단에 나누어 심었어요.
올 여름은 그 꽃이 피어 누구를 행복하게 할까요?

요즈음 아름다운 꽃들로 인해 행복합니다.
길을 걷노라면 꽃들을 가득피운 가로수들로 흥이 돋습니다.
집마다 정원마다 다투어 꽃을 가꾸고
공원을 가도 꽃들로 현란합니다.

간 밤도 봄을 타는 달은 활짝 핀 봄꽃들 바라보다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최고의 하나님께서 최고로 기뻐하실 봄입니다.
이런 꽃들을 심고 이런 꽃들을 가꾼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최고로 받은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는 우리 동족 가운데서도 우리가 누리는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나길 바랍니다.

우리의 작은 사랑과 관심으로 그곳에도  꽃동산을 일구었으면 싶습니다.

Friday, 1 May 2015

예수님 믿고 명품 되네 / 노하덕칼럼


  예수님을 믿고 뭐가 좋으냐 물으면,  '소품이 명품 되어가고 있습니다' 라고 답합니다.

         16세기 초, 이텔리의 플로렌스 지역에는 도나텔로라는 유명한 조각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생에 유명한 조각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카레라라는 지방에서 값비싼 대리석을 주문해왔습니다. 그러나 가져온 대리석을 검토해본 그는 쓸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성당 뒤뜰에 버렸습니다.
          그곳을 지나가던 무명의 조각가가 버려진 그 대리석을 들고 자기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대리석을 2년 동안 열심히 쪼아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1504년 1월 25일, 프로렌스의 시민들 앞에 이 조각을 덮은 베일을 벗겼습니다.
놀라운 작품이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그 유명한 미캘란젤로의 다비드상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예술성이 대리석 속에 들어갔을 때, 좋은 작품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는 진리를 영접한 어떤 개인이나 공동체, 국가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갈 때, 버려진 돌과 같은 존재들도 명품이 되곤 합니다. 사람이든 민족이든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고국 코레아만 두고 보더라도 우리 신앙인들이 보기에는 분명 진리를 영접한 후, 소품이 명품 되어 감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1985년도 고국을 떠나 독일에 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코레아의 위상이 별로였습니다. 독일 사람들이 '붐차'를 아느냐고 하여서 무슨 말인가 했더니 축구선수 차범근을 그렇게 말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말만 들어도 어깨가 들썩할 정도였습니다. 지성인들이 다투어 독일 광부와 간호사로 자원하던 때였으니까요. 그런 위상으로 인하여 당한 설움들도 많았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부부가 독일에 왔을 때, 간호사들이 영부인을 붙들고 벅찬 설움을 통곡에 담았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전설처럼 들려 오고 있지만요. 지금 동남아 지성인들이 한국에 와서 3D 업종에서 종사하며 설움을 겪고 있는 것에 비교한다면 자존심이 상하시겠지요?

         이보다 100년쯤 앞으로 가면, 코레아의 모습은 더욱 기가 막힙니다.
참고로 당시 캐나다 케이프 브레튼을 떠나 황해도 소래 땅으로 진리를 가지고 찾아간, 윌리엄 J. 메켄지 선교사님의 경우가 그 예입니다.
1893년 12월 12일 제물포에 도착한 그는 서울을 거쳐 황해도 소래 땅으로 들어갑니다.
조선인 옷을 입었습니다.
조선 음식을 입었습니다.
조선말을 배웠습니다.
동학란에도 소래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서 전쟁으로 상한 사람들을 돌봐주었습니다.
조선사람들을 위해 소래 교회를 세웠습니다. 수 백년 동안 서낭제를 지내던 바로 그 자리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코레아에 도착하여 함께 산지 1년 반만에  1895년 6월 22일 세상을 떠납니다. 조선 사람들과 똑같이 입고, 먹고, 생활을 했을 뿐인데, 너무나 건강했던 젊은 그는 건강을 잃고 고목처럼 쓰러지고 맙니다. 무엇이 아까운 그 선교사님을 그처럼 쉽게 무너뜨렸단 말입니까?
코레아의 당시 환경이 그만큼 열악했습니다. 사람이 살만한 환경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마지막 남기고 간 일기에는 거의 읽어볼 수가 없을 정도로 흐려진 필체로 이런 고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희망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는 그의 희망이란 말씀이지만, 그러나 그가 사랑했던 조선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코레아의 유일한 희망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선교사들이 헌신적으로 진리를 심은  결과 지금 한국에는 6만교회, 10만 목회자, 1,000만 신자가 있습니다.  12,000명 이상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세계 제2의 선교대국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의 모습도 많이 변했습니다. 우선 사람들이 많이 멋있어 졌습니다. 전에도 한국 여자들을 좋아하는 외국인들을 곧잘 만났는데, 이제는 한국 남자들과 결혼하고 싶어서 코레아를 찾아오는 여성들이 있다는 말도 듣습니다.
          어제 온타리오 호수 가를 어떤 형제와 함께 거니는데 이곳 캐네디언이 '안녕하세요' 한국말로 인사합니다. '이태원, 무슨 동' 하면서 몇 군데 서울 거리 이름을 열거합니다.
          한국 상품들이 세계 어느 나라에 가나  자랑할 것들로 넘치고 있습니다. 제가 타고 있는 현대 차 소나타만 해도 참 좋은 차입니다. 10년 전부터 저는 현대 차를 타 왔는데요, 그때보다 지금 현대차가 월등히 좋습니다. 세계 어느 차종에 비하여도 앞서가는 차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차 뿐 아니라 세계 1등 품목들이 많습니다. 핸드폰이나 전자제품들도 일본을 넘어 세계 1류가는 제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분 좋은 소식을 대할 때마다 저는 한사코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가 '소품을 명품으로 만들었구나'는 생각이지요. 진리가 한국 사람들을 자유케 하였다는 는 것이 제 소신입니다. 비기독교인들이 이 말을 들으면 황당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요.  많은 분들이 북한 동족을 위해 그렇게 하시는 것처럼, 저 역시 이런 기도를 곧잘 합니다. '북한 동족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복을 받고  자유함을 누리게 하옵소서.' 그들도 우리와 같이 진리를 받아들여 '명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죄인이었을 때, 연약한 자였을 때, 경건치 않은 자였을 때, 대신 죽으심으로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주시고, 하나님의 명품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권사님(양영숙)을 그리워하며 / 노하덕칼럼


           호스피스 사역과 연구를 하는 간호사 최화숙 교수의 '아름다운 죽음을 위한 안내서'란 책을 읽으면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나옵니다.
           "죽으면 끝이잖아요" 다 큰 남자가, 그것도 가족이 아닌 사람 앞에서 죽음이 두렵다며 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허공을 노려보며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여러 명 왔다고. '저리 가! 저리 가!'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당하는 두려움은 어떤 고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면하기 원하여
강한 수면제를 먹습니다.
강한 진통제를 먹습니다.
항암제를 맞습니다.
그런 것도 통하지 않을 때
죽고 싶도록 아픈 통증으로 인하여 어떤 사람은 자살을 감행한다는 말도 듣습니다.

그러나 고 양 영숙권사님은 이런 통증이 없이 죽음의 강을 건넜습니다.
           양권사님께서 받은 축복 중의 하나는 죽음의 강을 건너는 분들이 흔히 겪는 고통이 그분에게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분의 눈을 감겨드리며, 양권사님께서 참 고통 없이 가셨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굴에 고통이 스쳐간 흔적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은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당신은 나를 바꾸기 위해 병을 이용하고 계십니다'
죽음 앞에서 고통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때로 그 자녀를 깨끗케 하시려고 고통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양권사님께 무엇을 더 깨끗케 하시기 위해 고통을 주실 필요가 없으셨는지 모릅니다.  양권사님께서는 평소에 회개를 많이 해두셨거든요.
고통 없이 죽음의 강을 그냥 건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주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대로 우리 눈에 뵙기에도 복이 있는 모습이셨습니다.


           수년 전 양권사님께는 불면증으로 고통을 당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불면증이란 것이 얼마나 사람을 어렵게 합니까? 마음이 여리신 권사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가볍게 던진 조크 한 마디에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시면서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권사님께서는 로마서 8장을 암송하기 시작했고 이 말씀을 암송하는 가운데 불면증이 깨끗이 치료되었습니다.
           이것이 체험이 되어서 양권사님께서는 평생 시간만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공부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성경을 암송하도록 훈련하셨습니다.
           권사님께서는 성경을 암송하심으로 병을 이기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말씀대로 삶을 고쳐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장례식장에서 적절한 성경말씀을 찾기 위해 고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권사님에게서 고통을 다 극복할 수 있게 하였던 이 말씀을 그대로 전해드리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양 권사님을) 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죽음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양권사님을 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 또한 끊을 수 없음을 믿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7순이 넘으신 지난주까지도 사람을 키우는 한 알의 밀알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장례 예배 중에 기도와 사랑의 편지를 낭독한 이 세은 자매, 그리고 이화연 집사님은 양권사님과 최근까지 성경공부를 한 분들입니다.
권사님께서는 세 그룹의 사람들에게 매주 세 차례 창세기 성경공부를 인도하셨습니다.
           이세은 자매는 양권사님께서 세상을 떠나시던 날 밤 6시, 양권사님께 성경을 배우기 위해 양권사님 게시던 집 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약속을 어길 리가 없는 양권사님께서 그 시간 약속을 지킬 수 없었던 까닭은 바로 그 시간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여행을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양권사님께서는 이화연 집사님께 창세기 성경공부를 전하심으로 귀히 쓰임을 받으시도록 늘 기도하셨는데, 하나님 나라로 떠나시던 그날에도 이화연 집사님 집을 찾아가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다만 Good Bye!라고 인사를 남기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집사님은 "보석이 없으셔도 빛나던 분, 믿음의 어머니로 저의 곁을 든든히 지켜 주셨던  사랑하는 " 양권사님을 눈물로 환송하며 '사랑의 편지'에서 이렇게 묻습니다

"하지만  권사님 제게 약속을 어기셨어요  아시죠?  창세기 8과가 끝났을 뿐인데 20과까지 내 주신 숙제검사도 하셔야죠."

           양권사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그분이 섬기던 세 그룹의 성경공부팀은 선생님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양권사님께서 그분들 안에 한 알의 밀알로 다시 움틀 것을 저는 믿습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저는 양권사님의 죽음이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무대에서 아름다운 작품을 올려드리고 무대를 내려오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생애는 최선을 다한 한 편의 감동적인 드라마였어요. 주역을 맡았다고 말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경성의전을 들어가셨을 만큼 능력이 있었지만, 6.25후, 당시 이발사 아저씨들만큼도 남편감 후보로는 인기가 없었다는 신학생과 결혼하셨으니까요.
지금은 2000명의 영혼들을 매일 섬기는 하남 장로교회로 성장했지만, 당시 권사님께서 부군과 함께 교회를 개척하실 때, 맡으신 배역이란 공동묘지 곁에 흙벽돌을 찍어 하늘이 훤히 보이는 교회당을 세우고, 거적 위에 무릎을 꿇고 밤마다 귀신과 더불어 싸우며 기도하시던 일이 권사님의 맡은 일이셨습니다.
           목사도 되어보지 못한 채, 경겁간에 세상을 떠나신 부군을 보내고, 일곱 살 난 아들의 손을 붙들고 태평양을 건너 홀로 자식을 키우기 35년!
권사님은, 비록 아역이랄 수밖에 없는 위치에 늘 계셨지만 당신에게 맡겨진 배역을 훌륭하게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퇴장하셨습니다.
총 감독이신 하나님의 흡족한 웃음을 생각해봅니다.

죽음을 '걱정은 되지만 대단치 않은 것'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권사님의 경우 죽음은 참 숭고하셨어요.

           지금 지구 동쪽 끝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최장로님께서 양권사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들으시고 보내오신 편지를 읽음으로 글을 맺습니다.

권사님이 남기신 아름다운 여운들은
오랫동안 메아리쳐 올껍니다.
편히 쉬세요.
안식하기에는
그곳이 훨씬 좋으니까요.

입에 비록 쓸지라도 / 노하덕칼럼


"아빠, 주스를 좀 사주세요."

"응, 그렇게 하자.'

하고 좀 돌이켜보니, '아니 어제 주스를 사다놓은 걸 보았는데 ....  .' 생각이 든다.

문제는 위로가 주스를 앉은자리에서 한꺼번에 모두 마셔버리는 것이다.
뭐 주스 값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먹는 것이 건강에도 좋지 않을텐데 싶다.

위로 엄마와 상의하여 달콤한 주스보다 좀 씁쓸한 Grapefruit 주스를 사다 놓기로 했다.
씁쓸하지만 적당하게만 마시면 아이의 건강에는 좋을듯해서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 주스를 마신 흔적이 없다.
"위로야 주스 사달라며?"
"너무 짜요"
"?"
이곳 캐나다에서 태어나 자라다 보니 쓰다는 말을 짜다고 말하는 것이다.
너무 쓰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 너무 쓰다고? 그래도 네 건강에 그 주스가 더 좋을 것 같아서 사온 거야!"

사람들은 수군거리는 말에는 달콤해 하면서도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음담패설은 솔깃하면서도
순종이 필요한 하나님 말씀은 쓰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를 자유케 하는 진리는 항상 쓰다.
열매가 달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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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손잡고 산책하는 기쁨

        켐벨 몰간 목사님은 매일 오후, 사랑하는 딸의 손을 잡고 공원 산책하는 일이 제일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이 가까워진 어느 날, 딸이 며칠 동안 함께 공원을 산책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의문점은 성탄절 아침에 풀렸습니다. 딸은 그 시간에 아버지께 드릴 성탄절 선물로 슬리퍼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안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수고가 많았다. 고맙다. 그러나 이 아빠는 어떤 선물보다 네가 나와 더불어 같이 손잡고 산책하는 것이 더 좋단다."

정성을 들인 자녀의 선물이 얼마나 값진 것입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좋은 사람과 더불어 마음을 나누는 교제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분과 교제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름다운 말 가운데 안식이란 단어가 있습니다. 이 안식도 주님과의 교제가 있어 이루어지는 축복입니다. 지금 추운나라에서 일하고 계시는 최 선교사님께서 늘 주님과 교제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권사님께 이런 편지를 적으셨습니다.

편히 쉬세요.
안식하기에는
그곳이 훨씬 좋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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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와 새로운 부품 / 노하덕칼럼


        금년 초, 아무 데나 쉽게 가지고 다니면서 일할 수 있는 중고품 노트북을 $400에 구입하였습니다. 좀 무겁고 오래되었지만,  IBM 상표가 붙어 있는 매우 견고한 제품입니다. 값에서 부담이 덜하고, 저의 작업은 그 용량으로 충분하거든요. 세계선교대회와 여름 수련회에서 잘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컴퓨터를 켜니 깜깜합니다. 아예 Power가 작동되지 않습니다. 제가 애용하는 컴퓨터 가게에 가지고 갔습니다. 거금 $80을 지불하고 새로운 부속을 끼워 넣었습니다. 컴퓨터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잘 작동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을 통해 사람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망가진 컴퓨터가 제 기능을 회복하는 과정을 두 단계로 생각해 본 것이지요. 먼저 망가진 부분이 어디인가를 알아내고, 다음 단계는 고장 난 부속을 빼내는 넣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망가진 부분을 찾아내어 그 부분을 제거하는 일이 회개 말입니다.
       
        그 다음은 새로운 부속으로 끼워 넣는 단계가 있습니다. '복음을 믿는' 일입니다.
        컴퓨터의 망가진 부분을 알아서 그것을 새로운 부속으로 교체할 때 컴퓨터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우리가 잘못된 부분을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 믿음으로 온전한 인간의 기능이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에서 영적 건강을 회복하고 하나님 백성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첫 번째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이런 권면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지만 사람들마다 자기들의 의가 잡초처럼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뽑아내는 것이 힘듭니다.
옛 사람과 그에 속한 것들을 부숴야 하고 깨뜨려야 하는데 , format을 해야 하는데 어느 한 가지 뽑아 버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유병국 선교사님께서는 감비아에 선교사로 10년을 사역한 후, '김치 하나도 포기 못한 선교사'란 책을 썼습니다. 감비아의 열악한 식품 문화 속에서 김치를 그리워하는 선교사님의 마음과 그러나 김치 하나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진솔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다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옛사람에 속한 무엇을 포기했는가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당황해 합니다. 별로 없거든요. 물론 담배를 피우던 사람, 술을 마시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은 후, 그런 기호 식품을 포기했다는 간증을 가끔 듣습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했다는 사람은 만나기 힘듭니다. 자신의 좋지 못한 성깔을 포맷했다는 말도 듣기 힘듭니다.

한 노인이 송어를 계속해서 낚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강가에 앉은 다른 많은 낚시꾼들은 허탕을 치고 있었습니다. 동일한 낚싯대와 미끼를 사용하고 있었음에도 말입니다. 한 젊은이가 잘 낚는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이렇게 송어를 잘 잡는 비결이 있습니까?"
"그럼, 송어 잡이에는 세 가지 규칙이 있다네."
"그게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첫째는 자신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네."
"둘째는요?"
"더욱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네."
"셋째는?"
"전혀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라네."


어릴 때 하던 숨바꼭질 동요가 생각나지요?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내적인 포기란 언제 보아도 어렵습니다. 이런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계2:5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로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여기 수건이 있습니다 / 노하덕칼럼

땀을 닦으세요.
여기 수건이 있습니다.


기도 가운데,
하나님 말씀을 전하시면서,
찬양을 올리시며,
영혼을 구하는 현장에서,
하나님과 한 조가 되어 사역하신지 수십 년
좋은 작품을 이루어 보리라
야무지게 다무셨던 어금니는 모두 함몰되었고
어느새 깊이 패인 주름 사이로 땀이 흐르고 있군요.

여기 수건이 있습니다.
땀을 닦으세요.


바위덩어리처럼 단단하던 젊은 시절,
때로 양떼들과 뒤엉켜 서로 상하기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 날 밤이면 선잠조차 다 주무실 수 없었지요?
그 깊은 밤,
님께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엎드리곤 하셨습니다.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등뒤로 흐르는군요.

여기 수건이 있습니다.
땀을 닦으세요.



이제는 차라리 내가 부서지고
또 부서짐으로 고운 가루가 되시다
어느새
땅에 떨어져 썩어지는 한 알의 밀 되셨으므로
이제 싹이 나고.......     .
머잖아 열매를 맺겠지요?
성령의 물은 영혼 깊숙이 스며들고
하나님께서 원하신 그때를 놓치지 않으려 한 생을 달려오신
님의
주름진 목덜미엔
진액이 축축이  솟아나고 있네요.

여기 수건이 있습니다.!
땀을 닦으세요.


밤새워 그물을 던지느라 허기지던 때가 많으셨지요?
사람을 살리자는 희생이었기에,
이렇게 하여 다가온 노년은
한물 간 끝물이 아닙니다.
이제 바야흐로 원숙하게 익어갈 과실 바라며
쌓인 노고가 눈처럼 쌓이고 있습니다.

여기 수건이 있습니다.
땀을 닦으세요.



때로 헉헉거리시는 호흡이 내 안에 들리는 까닭은 늙으심 아니라
좀더 주님과 보조를 잘 맞추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일 뿐입니다.
사실 말이지
오늘만큼  하나님과 호흡이 맞았던 때도 없잖아요?
있는 힘 모두 쏟아 소진하시고
그래도 혹시 상한 영혼 없었는지
주님 앞에 서실 그 일로 인하여 땀이 납니다.


여기 수건이 있습니다.
땀을 닦으세요.


드디어 휴게실에 도달하셨군요.


이제 주님께서 일하실 차례입니다
멀리서 다가오는 나팔소리가 희미하게 들리시죠?
어디로 오는 천사일까요?
님께서 흘리신 땀방울마다 면류관에 엮어질 옥구슬이 됩니다.


여기 수건이 있습니다.
구슬처럼 뚝뚝 드는 생명이 담긴 땀을 담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