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가 사막화되고 있습니다.
사하라 사막 주변이 급속히 그 지경을 넓혀간다는 보도가 나옵니다.
요즘들어 더욱 극성을 부리는 중국의 황사현상도 지구의 사막화 일부라는 보도를 만납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인간성의 사막화 또한 심각해 보입니다. 6.25란 무서운 전쟁을 겪으면서도 피난민들을 따스하게 맞으며 이웃을 돌보며 국란을 극복하였던 인정어린 우리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신문들을 보면, 인성이 얼마나 무섭게 사막화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2005년 1월 24일자 조선일보 인터넷 신문을 보니 일면 톱 기사가 ‘신생아 청부납치, 친모는 살해’입니다. 다음 기사가 ‘20대 동거남녀 자신들의 아기 살인 유기’입니다. 부제가 ‘7개월 아기 버리고, 11개월 아들 버리고’입니다. 다음 날의 신문엔 이런 기사도 보입니다. '모시고 살기 싫다 노모와 이웃집 노파 살해!' 이렇게 인성이 사막화되어가는 것을 들으며 시106:15이 생각납니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현대인의 사막화된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5장은 영적 사막화로 인하여 고통받은 광인이 어떻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였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그 광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나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5:5:3-5)
광인은 귀신들린 자입니다. 그는 귀신에게 붙잡힌 후, 그 세력 안에서 자아를 상실한 사람이었습니다(W.Hendriksen).
그는 아주 난폭한 사람입니다.
포악하게 변하며 자기를 파괴합니다(5절).
소리지르고 자신을 상하게 합니다.
이 광인은 자기 사명을 상실하고 짐승처럼 사는 존재입니다.
다음은 제가 그 광인 입장에 서서 그 심정을 기록한 작품입니다.
저는 광인입니다.
저는 귀신들린 자입니다.
저는 귀신에게 인생을 점령당한 자입니다.
저는 무덤 사이에 버려진 자입니다.
저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내팽겨쳐진 자입니다.
저는 사람들의 관심 밖에서 죽어 가는 존재입니다.
저는 작은 자입니다.
저는 소외된 인생입니다.
그래서
저는 참 외롭습니다.
사람들은 저를 귀신들린 자라 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미친놈이라 손가락질합니다.
제 생각엔 그들이 나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한데
사람들은 저를 너무도 잘 아는 듯 말합니다.
제 생각엔 그들이 나에 대하여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 듯한데
사람들은 저를 너무도 잘 이해하는 듯 공언합니다.
그래서
저는 참 외롭습니다.
저도 누구에겐가 듣고 싶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저도 누구에겐가 확인하고 싶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그러나
아무도 저에게 다가와 사랑한다 말해주지 않습니다.
사랑을 확인해주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얼마나 사랑을 갈망하는지 알까요?
제가 얼마나 사랑이 필요한 존재인 줄 알까요?
그래서
저는 참 외롭습니다.
저도 모든 사람들처럼 손과 발이 자유롭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의 손과 발에 쇠사슬이 묶여 있어야 안심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제 손과 발에 쇠사슬 묶여 있음을 확인하려 할 뿐,
제 가슴에 채워져야 할 자유엔 무관심합니다.
저는 누구보다 자유가 필요한 자인데
사람들은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나를 생각하나봐요.
저도 사실은 자유인이고 싶은데
사람들은 저의 자유를 부자유스러워 합니다.
저의 자유함이 남을 부자유하게 하는 존재
그래서
저는 참 외롭습니다.
광인은 이로 인하여 무섭게 사막화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부모님은 자신의 생명 이상으로 그를 사랑하며 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를 이렇게 사막화시켰을까요.
성경은 귀신이 그를 점령해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령에 충만해야할 그가 귀신에 점령당했을 때, 그 인생은 이토록 비참하게 사막화가 됩니다.
어떤 사람은 주고 받아야 할 사랑이 고갈됨으로 사막화됨을 느끼게 합니다. 중학교에 다닐 때,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떤 고아 친구의 가슴에서 사막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가 특별히 누구보다 못먹고 못입은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의 가슴에는 황폐한 사막이 있었습니다.
부부간에 사랑이 없을 때, 가정이 사막화되어 갑니다.
교우간에 사랑과 이해가 부족할 때 교회가 사막화 되어갑니다.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광인은 사막화되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그가 광인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현장에 예수님께서 사막화 된 광인을 찾아오셨습니다. 광풍을 헤치고 바다를 건너 광인을 찾아오셨습니다.
광인을 고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바꾸시려고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사막같은 그의 심령을 옥토로 바꾸시려고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사막화 되어가고 있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사막화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주님께서 사막화되어가는 우리를 찾아오시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와 인격적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귀신조차 모르게 그와 인격적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인을 찾아오셨을 때, 귀신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습니다(6,7절).
멀리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보지 못하였는데 그런데 귀신은 예수님을 알았습니다(7절)
귀신같이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였습니다.
다만 귀신은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예수님을 인정하지만, 알고 있지만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는 갖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무관하게 사는 삶, 이것이 그를 사막화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찾아오시고 그와 인격적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2000마리의 돼지를 희생하면서 한 생명을 구하시고 그와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기까지 그의 사명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광인이 변하여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적 상황을 노래한듯한 찬양이 있습니다.
나는 길잃은 나그네였네
죄중에 방황하는데
사랑의 왕 내 목자 예수
나를 집으로 인도하네
사막화된 그의 인생을 회복하셔서 물댄 동산과 같이 넉넉한 삶으로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