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30 April 2015

하나님과 함께 춤을 추어요 / 노하덕칼럼


손정숙 님의 수필집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7회 동계 올림픽 때 있었던 아이스댄싱의 이야기인데요.
영국의 제인 토빌과 크리스토퍼 딘이 한 조를 이루어 출전하여 동메달을 땄다는 이야기입니다.
뭐 그랬나 보다 했는데, 읽어가다보니 깨닫게 되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19년간을 호흡을 맞추어 왔습니다. 아이스댄싱 부문에서 한물 간 나이로 취급당하는 36,35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10년 전, 그 분야에서 세계를 평정하여 금메달을 거머쥐었던 실력자들이고, 그날 누구보다 마음껏 묘기를 펼쳤습니다. 이를 본 그날 대부분 관중들이 그들의 실력에 매료되어 금메달 감으로 지목하였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동메달밖에 따지 못했느냐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지요.
그 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서로 떨어져 춤을 추던 이들이 다시 손을 잡은 것이 경기 규정시간 보다 1초가 늦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그 아름답고 완벽해 보인 아이스댄서들의 작품이 마주 잡아야 할 1초를 놓치게 되면 실점이 되는 모양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절묘한 하나님 백성의 법칙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아이스댄싱을 하는 한 팀일 수 있다는 그런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역에서 일하시고,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대로 활동하는 영역이 있지만 서로 한 조가 되어 작품을 이루어 가는 아이스댄서로 비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들이 하는 일과 전혀 달라 보이지만 사실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 성도를 염두에 두고 크고 비밀한 일을 행하시지요,
우리가 하나님과 한 조가 된 아이스댄서라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늘 초점을 맞추게 마련입니다. 그냥 춤추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모든 뜻에 나의 삶을 조화시키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하나가 되어야 할 시간이 오면 우리는 서로를 향해 달려옵니다.
예배드리면서,
기도 가운데,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서,
찬양을 드리면서,
한 영혼을 구하는 선교 현장에서
1초를 놓치지 않겠다는 절박함으로
반드시 좋은 작품을 이루리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이스댄싱에 참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더러 오라고 우리를 향해 손을 내밀 때,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해 미끄러져 갑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 아담을 향해 뻗으신 하나님의 손을 생각하면서.......    

세상일에 정신을 팔다가 가장 중요한 만남의 그 순간을 놓쳐버리면 안되니까요.

깨어짐의 영성 법칙 / 노하덕칼럼


존경받는 중세 수도사 한 사람이 젊은 수도사를 교육하고 있었습니다.
그 젊은 수도사에게는 아직 좀 시건방지고 교만한 구석이 남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바른 교육을 시킬까 노 수도사는 고심하면서 젊은 수도사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여기 물 좀 붓지"

딱딱하게 굳은 흙덩어리를 만지면서 말했습니다.
젊은 수도사는 길어 온 물을 부었습니다. 그런데  딱딱한 흙덩어리다 보니 물이 흙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옆으로 흘러내리고 맙니다.
"이런 딱딱한 흙덩어리는 물을 받지 못하네"
그는 옆에 있는 망치를 집어들더니 그 딱딱한 흙덩이를 부수기 시작했습니다.
가루가 되도록 흙덩어리를 잘게 부수었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물을 부어 보라고 합니다.
젊은 수도사가 부서져서 부드러워진 그 흙 속에 물을 붓습니다.
이내 그 물은 흙에 스며들고 흙을 축축이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그 수도사는 웃으면서 말합니다.

"여기다가 말이야. 씨를 뿌리면 싹이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겠지?

이것을 우리 수도하는 사람들은 깨어짐의 영성 법칙이라 말한다네."
(헨리 나우엔의 책에 소개된 이야기입니다)

자녀로 택하신 하나님의 꿈은 '과실을 맺게하고 또 그의 과실이 항상 있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로 부름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열매맺는 삶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깨어지는 걸 싫어합니다.

자신의 철학과 경험, 자신이 쌓아올린 부와 명성,
이런 것들이 깨어지면 큰 일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것들이 자기를 구원할 것으로 믿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구요.
자아가 깨어져 심령이 온유해진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는 기업을 약속하셨습니다.
열매를 맺게하십니다.


베드로는 깨어짐 속에서 예수님을 새롭게 만났습니다.
먼저, 자신이 께어져야할 죄인임을 인식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깨어진 베드로의 자아 위에 주님께서는 성령을 부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어주신 하나님의 물로 인하여 아름다운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베드로는 계속적으로 자아가 깨어졌습니다.
그리고 변화되어 갔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까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앞에서나 수많은 회중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까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19-20)
두려움은 사라져 갔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사도가 되기까지.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잠언 17:3

고통을 넘는 사랑 / 노하덕 칼럼


황병철님의 책을 읽다가 언뜻 깨달은 이야기인데요


하나

추운 북극이나 남극에 사는 펭귄은 아빠 펭귄의 발등에 알을 낳는답니다.
아빠 펭귄의 발등엔 털이 많이 나 있어서 알을 부화하기에 좋은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두 달 동안 아빠 펭귄의 발등에서 지내다 새끼가 부화되면 어미 펭귄은 먹이를 새끼에게 주어 키운답니다.
그때까지 쫄쫄 굶으면서도 새끼가 부화될 날을 기다리던 아빠 펭귄은 드디어 사명을 다 하고 바다로 향하는 중 대부분 아빠 펭귄들은 죽어간다는군요.
아,
너무 눈물겨운 이야기지요?

          그러나 저는 그보다 더 눈물겹고 감동이 있는 이야기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벗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벗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란 하나님의 자녀를 부화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십자가의 고통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의 작품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길 기다리신 것입니다.
참 추우셨을 텐데...   .
참 아프셨을 텐데....  .
참 고독하셨을 텐데...   .
마치 아빠 펭귄이 그 발등에 두 달 동안이나 알을 두고 기다린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극상품 열매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끊어지셨습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극상품 열매를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겨울을 나셨습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극상품 열매를 이루기 위해 한 알의 밀 알로 썩어지셨습니다.

때로 나의 자아가 뭉개지는 고통을 당할 때,
우리 위해 짓이겨질 대로 짓이겨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토기장이는 잘게 빻아 체질한 흙을 물에 풀어 반죽합니다.
그런 다음 커다란 나무망치로 무수히 흙반죽을 내리칩니다.
그렇게 하면 흙 속의 공기가 빠집니다.
흙과 흙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고 흙은 엉겨붙어 차지게 됩니다.
그래서 많이 짓이겨진 한 흙일수록 좋은 토기의 재료가 됩니다.

구두 수선공의 망치아래 좋은 가죽이 무두질을 당하듯
그래야 털이 뽑히고 기름이 온전히 처리되듯
양질의 철들이 대장장이에게 뭇매를 맞듯
소제가 고운 가루로 빻아질 때 제물이 되듯

그러고 보면,
우리가 지고 가는 십자가란
좋은 자기로 빚어져 가는 반죽 과정일 수 있습니다.
맹렬히 돌아가는 녹로 위에서 살점이 뜯겨 나가는 그 현장일 수도 있습니다.
온몸이 빨갛게 달궈져 가는 가마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프고 어지럽습니다.
뜨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통하여 지금보다 훨씬 쓸모 있고 아름다운 존재로 세상에 나타납니다.
꼭 필요한 존재, 유익한 존재로 세상에 나타납니다.

우리 주님께서 전능자의 채찍을 대신 받으시고 대신 고난을 당하신 겨울을
그래서 우리 신앙인들은 사랑하나 봅니다.

대신 고통을 받으신 그분으로 인하여 / 노하덕칼럼


제1차 세계대전 때의 일입니다. 영국 군함이 파손되어 물에 뛰어든 병사 한 명이 간신히 널판 하나를 붙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는 자기와 같이 수영을 잘하지 못하는 병사 하나가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동료에게 널빤지를 붙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널빤지는 너무 작아서 두 병사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채 자꾸만 가라앉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동려에게 널빤지를 내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아무쪼록 살아서 돌아가시오."

동료 병사는 극구 사양했습니다.

"아니오.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이니 천국에 가겠지만, 당신은 아직 믿지 않은 모양이니 살아서 예수님을 믿고 준비하여 천국에서 만납시다."

그는 널빤지를 놓고 물에 가라앉았습니다.
동료는 널빤지를 붙들고 헤엄을 쳐서 나와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독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이 사실을 전해주었습니다.

만일 널빤지를 넘겨받아 목숨을 건진 그 사람이 자신이 잘한 공로가 있어서 살아난 것처럼 말하고 다닌다면 나쁜 놈입니다.
자기를 대신해서 죽어간 그 한 사람의 사랑을 전하지 않았다면 그는 나쁜 놈입니다.
그는 다만 사랑의 빚을 진 사람일뿐입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가 이런 사랑을 입었다고 전해도 자랑할 것은 없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당연한 일을 하였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 -

인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어떤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인도에는 좋은 신들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 할아버지는 담담히 대답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나를 위해 죽은 분은 없다오"


- 둘 -

램브란트란 화가는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는 모습을 색채로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군중들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불현듯 그는 그 군중 속에 자신을 그려넣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못박았구나. 내가 이 악한 일에 동참하였구나."


- 셋 -

헨델은 어느날 이사야 53장을 읽어갔습니다.
고난당하시고 영광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의 영혼을 뒤흔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조용히 '그 메시아'를 그의 악보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발견된 그의 악보는 눈물 자욱으로 얼룩져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 넷 -

스펄젼은 1868년 10월 4일 주일 설교에 이런 내용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내려친 채찍은 로마 병정들의 것이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전 인류에게 내려치신 채찍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그의 몸과 영혼으로 가로막아 대신 맞으셨습니다."

그리고 몇년 후,
이런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반드시 치료받아야 할 질병으로 여기십니다.
그러나
죄의 결과로 영적 질병이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라는 치료제를 장만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란 말씀은
너무 가슴 아프고
하지만
너무나 기쁨에 넘치는 말씀입니다."

그 치료약은 효과가 즉각적이고 완벽합니다.
그 기이한 치료약을 병자들에게 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 다섯 -

14년 전에 어머니를 잃은 한 선원이 런던 바오로 성당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낭독하고 있었습니다.
칠년 후,
갑판 위를 오락가락하던 그 청년은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이 생각나서 중얼거렸습니다.
"내가 어디서 이 말을 들었지?"
그러나 지금까지 40년을 살아왔지만  기도한 적이 없었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일생에 단 한번도 기도하지 않았다니.....    .'
성경이 있으면 한 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갔습니다.
그때, 20년 전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 유물이 떠올랐습니다.
허겁지겁 달려가 사물함을 휘젓던 손에
밑바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성경을 만났습니다


- 여섯 -

한 젊은 청년이 소책자를 나누어주려고 정박해 있는 배에 올랐습니다.
선상을 거닐고 있던 노신사 한 분이 기쁘게 그의 책을 받았습니다.

"식료품 가게의 포장지처럼 사용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르신!
버터나 치즈를 싸는데 성경의 책장들이 쓰일까 두려워서요."

노신사는 그 청년에게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었습니다.

"12년 전까지 나는 엄청난 골초였다네.
경건하지 못했고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했네.
그러던 어느날 ,
나는 가게에 들러 담배를 사가지고 나왔는데
그 담배들은 성경 낱장으로 말려 있었다네.
나는 담배를 피우는 동안 그 담배 거죽을 보았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인으로 모셨다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빚진 자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제사장이 되었는데,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가신 그분께 감사하는 일은 지당합니다.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요. / 노하덕칼럼


- 하나 -

빌라도는 당시 출세한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조건들을 많이 갖추고 있었습니다
권력이 있었습니다.
재력이 있었습니다.
무력이 있었습니다.
학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진정한 왕이 누구인가 알만한 사람이
죄 없으신 의인이라 그 아내까지 말하던
예수 그리스도를 채찍과 십자가형에 넘겼습니다.
무엇인가 할 수 있었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빌라도
깨끗한 척 손만 씻고 서 있었습니다.
연약한 자매 마리아도
고난의 길로 떠나시는 주를 위해 옥합을 깨뜨리는데
주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아리마대 요셉은 전체를 걸고 주님의 몸을 무덤을 뉘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맺어져 있지 않은 빌라도
끈 없는 연처럼 버려집니다.
아무리 높이 날면 무엇합니까?
아무리 멀리 날면 무엇합니까?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하셨건만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 않은 그의 연이란
멀리멀리 날아가는 서글픈 이파리 같았습니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 둘 -

가룟 유다는 한 때 주님의 언약에 연결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높이 날았고
멀리 날 수 있었습니다.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주관이 뚜렷했습니다.
애국심도 살아있습니다.
수완도 있었습니다.
철학도 있었습니다.
재정관리에 능했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향한 열린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주님과 연결된 언약이 흔들리더니,
주님과의 언약이 얇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이 몹시 심하게 불던 어느 날
주님께서 그를 강하게 끌어당기던 성만찬의 밤,
그의 연은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멀리멀리 날아갔습니다.
위기는 얼마든지 전환될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는 목을 주님께 바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식사기도가 끝나자마자
반찬이 이게 뭐야 투정하는 사람처럼
그는 소중한 인생을 쓰레기처럼 피 밭에 목메 달았습니다.
그리고 줄기로부터 끊어진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말라 비틀어졌습니다.
'한번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 셋 -

우리 고국 인기 드라마 가운데 '풀 하우스'란 문제작이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부유한 청년이 가진 것 없고 집안도 없는 고아인 아가씨를 신부로 맞습니다.
계약결혼 형식으로.
침실만 따로 쓰는, 그러나 엄연히 결혼 반지까지 나눈 부부입니다.
그들은 결국 서로 반드시 있어야 할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정식으로 청혼, 부부가 되는 그런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그 드라마에서 제가 유심히 보게 된 핵심 주제는 결혼반지입니다.
생활 중 중대한 고비를 만날 때면, 그들은 조용히 결혼 반지를 봅니다.
언약을 붙들고 기도하는 당신처럼!
그리고 힘을 얻습니다.
바람은 줄곧 불고 있었지만
결국 언약은 이루어집니다.



- 넷 -

오늘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언약 관계에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으로 맺어진 언약관계입니다.
'풀 하우스'의 주인공들이 언약의 반지를 나누고 온전한 결혼의 날을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는 약속을 가진 신부들입니다.
나의 연은 주님의 언약에 어떻게 연결되어 있습니까?
신랑 되신 그분이 오실 날이 가까운 이때
높이 나는 나의 연입니까?
멀리 나는 연입니까?
주님과 연결된 끈을 점검해 보고
굳건한 반석 되시니 그  언약 위에 다시 서는 오늘이 되시길!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
그날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시길!


새로운 약속 히브리서에는 이런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게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히3:13-14)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히6:4f)

외로울 때, 곁에 계신 당신! / 노하덕칼럼


지선의 젊음은 술취한 운전사로 인하여 망가졌다.
아름다운 그의 외모는 치솟아 오른 불길 속에 연기와 함께 날아갔다.
그러나
깨어난 그의 곁에는 부모님이 계셨다.
자기 몸처럼 누이를 사랑하는 오빠도 있었다.
교우들이 그녀를 전보다 더 가까이 했다.
그 고통스런 수술은 끊임없이 되풀이되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녀와 함께 하셨다.
극한 고난 중에서도 가까이 다가온 사랑으로 인하여
이제
지선은 자신을 망가뜨린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고가 난 사실까지도 감사하면 산다.
그는 실패한 것 같았지만 승리하였다.

그러고 보면,
아픔의 순간에 곁을 지키는 건 천사다


아들 위로에게는 10년지기 친구가 있다.
어느 날, 그 친구에게 오해받을 만한 사건이 생겼다.
그런데 위로가 정색을 하며 말한다.
'아빠, 그게 왜 그 친구의 잘못이예요?'
누구도 그런 형편에 서면 그럴 수 있는 일이 아닌가 하고
친구를 이해하고
친구를 변호하고
친구를 보호한다.
아들이지만 존경스런 마음이 든다.
위기를 당해보면 그 사람의 인품을 알게 마련인데
어려운 처지에 빠진 친구 곁에 서는 아들을 보며
참 뿌듯함을 느낀다.
그래, 그렇게 끝까지
위로자로 살아라.
친구를 이해하는 사람으로 그의 곁에 서라.


그러나 우리 주님이 외로우셨을 때는
아무도 그분 곁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뜨실 때는 그물과 아버지까지 버려두고 따르던 제자들도
정작 주님께서 지실 때는 모두 그분을 떠났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닙니다 고백하던 제자도 없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외치던 환호자들도 없었다.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예수님께는 베드로에게까지 흐르던 배신의 피가 많이 힘드셨을 게다.
본인은 인식조차 못하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주를 버리지 않을 줄로 아는
그 과신이 참 안타까웠을 것이다.
씨이저의 아픔은 정적들로부터 찔린 크고 작은 상처보다
사랑했던 브루터스 배신이었을 것이기에.

그러나
내가 아프고 외로울 때는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시며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 그리스도,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나를 위해 서 변호하시는
우리의 중보자!
나의 주님이시여!

온전히 맡기는 자가 받을 복 / 노하덕칼럼


           몇 주일 전 어떤 성도 한 분이 분재(Bonsai) 한 그루를 사무실 책상 위에 놓았습니다. 이틀에 한번씩만 물을 주고 가끔 햇볕을 쬐어주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일을 하려고 하니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물을 이틀에 한 번 준다고 하였지만 얼마나 주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햇빛을 가끔 쪼여주라고 하였지만 몇 시간씩이나 비춰주어야 하는지 이런 일들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분재를 옆으로 옮기던 저는 질겁을 하였습니다. 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화초가 목마름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놀란 저는 그 화초를 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화단에 놓았습니다.          
그날부터 화초를 키우는 주권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하나님, 이 화초를 살려주세요. 저는 어떻게 살릴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날로부터 화초를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때를 따라 비를 주셨습니다. 어떤 날은 폭우로 쏟아주시는 비가 너무 많게 느껴져서 뿌리가 썩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화초는 놀랍게도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보다 많은 새로운 잎들을 내고 있습니다.
           들에 나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키우신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확인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화초 한 그루라도 온전히 맡긴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음이 저려왔습니다.

부서지는 아름다움 / 노하덕칼럼


하나


 아들 위로와 함께 카누에 올랐습니다. 저는 카누를 사실상 처음 타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위로는 어릴적 한 번 타 본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용감한 부자가 되어 대서양에 우리의 카누를 띄웠습니다.
  하지만, 그건 만용이었습니다. 두 사람 다 미숙하다보니 카누가 우리 뜻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습니다. 제멋대로 떠 다닙니다. 바람은 물결을 출렁거리는데, 우리는 서로 노를 제멋대로 젓습니다. '아빠 무엇하는거예요? 위로야 왜 그렇게 젓니?' 서로 소리만 높아가고 카누는 제자리를 맴돕니다. 바람은 역으로 불기 시작하고 물결은 출렁거리는데. 카누는 점점 뭍에서 멀어갑니다.
  어느 정도 카누를 조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잡혔을 때, 저는 위로에게 선장직을 주었습니다. 위로가 명령하는 대로 저는 노를 저으면 됩니다. 그 방법으로 질서를 잡아 가니까 카누가 제방향을 찾아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위로는 선장노릇을 해보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는 카누를 자유자재로 저을 수 있는 기술을 배우니 또한 좋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순종은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성숙한 사람이 순종합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자에 의해서 우리들이 탄 배는 목적지에 이릅니다. 하나님께 생각이 있으신 것을 인정하고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노를 저어 갈 때, 인생에 진보가 있습니다.






여행 가운데 감사한 또 다른 체험이 있습니다.
P.E.I. 섬입니다.  Green Gable로도 널리 알려져 있고, 우리에게 '빨강머리 앤'이란 이름으로 많이 알려진 몽고메리 여사(목사 사모)의 발자취가 흠씬 배어있었습니다. 그곳을 보기 위해서 일본과 같은 극동아시아로부터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니, 세계 각처에서 몰려든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이해할 만합니다.
제가 감동한 끼딝은 이 한 사람으로 인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그 관광수입으로 섬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부요함을 누리고 산다는 말씀입니다.
그녀의 남편이 그녀와 부부였다는 사실만으로 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부모는 물론, 조부모까지 복을 누렸습니다.
그녀가 살던 마을은 말할 것도 없고 섬 전체가 복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자랐던 집터까지 대접을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집터와 정원만 구경하는데 거금 $7을 지불했습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비록 자신은 목사 사모로서, 작가로서 적잖은 시험과 고난의 길을 가야했지만,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하나님께 올려드렸을 때, 주변의 모든 것들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산산히 부서지는 아름다움이여!]

8월 마지막 주간, 저는 캐나다 동부지역을 다녀왔습니다.
꼭 가보고 싶었던, 그래서 10여 년 동안 꿈꾸어 오던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캐나다의 역사가 새롭게 쓰여진 땅입니다.
대서양을 만날 수 있는 땅입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여행에 필요한 여건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특별한 사정이 아닌 한 주일예배는 본 교회에서 드리는 것이 덕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주중에 다녀오기로 결단한 것인데, 다행히 저렴한 비행기 가격이 기다리고 있어 또한 감사했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짐을 챙겨 비행기를 탔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제가 만난 감동 1호는 산들바람에 휘날리던 대서양 하얀 속옷자락, Pegy's Cove을 만난 일입니다.
Peggy's Cove는 크고 아름다운 암반을 광대하게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서있는 등대는 외롭고 쓸쓸하다기 보다는 많이 본듯한 친숙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주었습니다.
저 광대하게 밀려오는 대서양의 검푸른 파도를 온몸으로 막고 선 암반들은 무엇일 수 있을까?
그 위에 홀로 서 있는 저 등대가 과연 무엇일 수 있는가?
분명 대서양의 검푸른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파도를 타고 밀려왔습니다. 온 땅을 삼킬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대서양은 그곳에서 깨어지고 있었습니다.
온 세상을 삼킬듯이 넘실거리는 대양이 조그만 해변에서 깨어질 수 있다는 것이 감동적이지 않습니까?
광대한 바다도 모퉁이의 조그만 암반에 깨어져 창백한 은빛으로 변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하얀 물보라로 깨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보고 또 보아도 좋아보였습니다.
겸손처럼 아름다웠습니다.
검푸른 바닷물도 산산히 깨어지면 저토록 아름답구나!
검푸른 바다일지라도 저토록 깨어지기만 하면 현란한 은빛이 날 수 있구나!
버림을 당하고 시험을 당하면서라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온전히 자아를 깨뜨리기만 하면 은빛이 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작품이 될 수 있구나!
이런 생각들이 스쳐갔습니다.

천하만민을 복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려고, 십자가에서 깨어지시며 분홍빛 피를 쏟으시며 부인당하시던 주님을 생각했니다.
엘리 엘리 깨어지고 부서지시며 복의 근원이 되시던 주님이 생각났습니다.
그날 부인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인류가 하나님께 거절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지게 되었는지............     .
그리고 나아가 나의 삶 속에 있을 깨어져야 할 자아가 있음을 생각했습니다.

흔적을 주우며 / 노하덕칼럼


휴가라는 걸 늘 송구스럽게 생각하던 중
몇 년만에 주보에 휴가를 닷새나 기록하고
봇짐을 싼다.

금년은 특히 우리 부부에게도 결혼 25주년이 되는 해니까
이래 저래 의미를 부여하면서
내어본 용기다.

하지만 가슴이 설레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아무래도 몇 년이 가도 휴가를 갖기 힘든 우리 서머나 식구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아닌가 생각한다.

휴가를 떠나면서
우리 착한 믿음의 식구들과
하나님의 꿈을 한 마디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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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나 교회는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가지고 있다.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이 가꾸는 화단에는 철따라 아름다운 꽃들이 화안히 웃고
교회 뒤뜰로 펼쳐진 공원은 쾌적한 산보코스를 자랑한다.
개울을 따라 걷노라면 양편에 색다른 자연 풍경이 펼쳐진다.
오른편엔 사람들이 잘 가꾸어놓은 잔디밭이 운동장처럼 연이어 펼쳐지고
왼편에 한적한 자연을 누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공원이 펼쳐진다.
왼편에는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공원이다.
내가 걷는 곳은 주로 왼편에 위치한 자연  공원이다.
그곳엔 어린 시절에 보고 누리던 식물들이 자라고 있고
그 위로는 나비가 날고 있다.
가꾸는 곳이든 가꾸지 않는 곳이든 자연은 참 아름답다.

그러나 인간은 식물들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피워내는 것 같지 않다.
자연 그대로 사는 사람일수록 그 흔적은 추할 때가 많다.
공원으로 가는 파킹장에는 추한 쓰레기들이 뒹굴고 있다.
주일아침이면 오실 성도들을 위해 쓰레기를 줍곤 하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착잡하다.
음료수병, 담배꽁초는 말할 것도 없고, 지저분한 쓰레기, 쓰다버린 콘돔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교회 뜰에서 무슨 짓들을 하는가!
도대체 인간이란 것이 이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다.

우리 인간도 저 화원의 꽃들처럼 아름답게 흔적을 남길 수는 없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하늘을 바라본다.
그리고 하늘의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우리가 이렇게 추하고 더럽고 경건치 못할 때에
주님께서 이런 죄인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상기한다.
외아들을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모든 더러운 것들을 대신 지시고 고난 당하게 하신 그 일로 마음이 떨린다.
이 일로 인하여 그 대속의 사랑을 입은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추하고 더러운 모든 죄인은 어느새 주님의 몸이 되어 하나님을 드러내는 존재가 되게 하시다니.
우리의 내면에는 어느 새 하나님의 언약이 흐르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나같은 죄인을 하나님의 친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유익한 연습 / 노하덕칼럼

 
운동이 좋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운동을 하고 보니 정말 좋습니다.
일주일에 한두 번 테니스를 합니다.
아들과 함께 가벼운 운동하는 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어제는 정예심 권사님이 생각나서 그 댁까지 걸어갔다 왔습니다.
말씀도 묵상할 겸, 권사님과 기도제목도 나눌 겸 해서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참 몸이 가볍고 정신도 맑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피곤하여 가라앉던 몸이 거뜬해짐을 느낍니다.
육체의 연습이 유익하다는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경건 생활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건이란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을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입을 여는 것입니다.
행동을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움직이는 것이 경건입니다.
생각도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범사에 유익"한 경건 생활은 그저 되는 일이 아닙니다.
연습이 필요하지요.
말씀 듣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건 훈련이 주는 유익은 육체의 훈련이 주는 약간의 유익 정도가 아닙니다.
범사에 유익하여 금생과 내생에까지 그 유익이 미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경건의 연습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를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전해주면서
감동에 젖어듭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사람들이 들을 만하도다."(딤전4:9)

양과 염소 / 노하덕칼럼


염소와 양은 겉보기에는 서로 비슷합니다.
얼른 보면 양이 염소 같고 염소가 양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양은 양이고 염소는 염소입니다.
종이 다른 동물입니다.

양은 주인의 음성을 알고, 주인의 말을 잘 따릅니다.
그러나 염소는 주인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잘 따르지도 않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염소 두마리를 끌고 꼴을 먹이러 나갔다가 혼이 났던 기억이 지금도 선합니다.
염소 두 마리를 몰고 꼴을 먹이러 나갔습니다.
양손에 염소 한 마리씩을 끌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제 힘이 부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염소는 저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고집대로 갔습니다.
자기 기분이 내키는대로 갑니다.
주인은 양 팔이 찢어질듯 고통스러운데 염소들은 막무가내로 제 길을 갔습니다.

염소는 주인의 말을 안듣는 정도가 아닙니다.
때로 주인을 들이 받는답니다.
우리와 같은 닫힌 공간에 들여놓아야 하는 주인의 돌봄이 필요한 짐승인데
주인만 들이받는 것이 아니라 서로 들이 받습니다.
추워 죽을망정 서로의 열기를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밤만 되면 추위에 약해 밖에 놓아둘 수 없는 존재이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염소를 사람들은 열심히 기릅니다.
흑염소라 할지라도 기른답니다.
들이 받힐지라도 기릅니다.
언젠가 보약으로 쓰일 그날이 있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양은 다릅니다.
주인을 신뢰하고
양끼리는 서로 의지합니다.
날이 싸늘하다 싶으면 서로 몸을 부비고 서로의 따스함을 나눕니다.
그래서 열린 공간에 두어도 곧잘 추위를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양은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데 쓰입니다.

본성대로 사는 우리는
원래 염소와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생명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고
예수님을 알아가노라면 어느새 우리는 점점 양처럼 변화가 되어갑니다.
염소처럼 들이 받기 좋아하던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고 감싸주는 양같은 성도가 되어갑니다.
염소처럼 말을 듣기 싫어하던 고집스럽던 우리가
양처럼 주인의 말을 듣고 따르는 온순한 주의 양이 되어갑니다.
나 홀로 잘났던 과거를 접고 서로의 따스함과  사랑을 나누는 그런 양이 되어갑니다.

그러다 주님 오시는 그날 우리는 한 음성을 주님으로부터 들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하신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마25:31-33)

나의 현주소는?

원주민 선교 / 노하덕칼럼


원주민 마을에 드나들기도 십일 년,
십 년이 넘게 드나들었다고 하니 뭐 대단한 일 했느냐 하면 천만의 말씀이다.
그저 해마다 한두 차례 시간을 내어 다녀왔을 뿐이다.

원주민 마을이 어디에 있다더라 해서 궁뭄한 마음에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어떤 원주민 사역자가 잘 한다더라 해서 만나러 가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식사를 하고 교회에서 준비한 얼마의 격려금을 전하기도 했다.
'장하십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2세 청소년들이 원주민 어린이들을 위해 성경캠프를 하겠다고 해서 운전사 겸 해서 다녀오기도 했다.
좋은 영화가 있어서 그들과 함께 보기도 했다.

무슨 철학이나 선교에 투철한 신념이 있어서라 한다면 당혹스럽다.
그러나 그들에게 무슨 이익을 얻자고 찾아 간 것도 아니다.
그냥 원주민이니까 찾아갔을 뿐
우리와 생긴 모양도 비슷하니 먼 형제 정도라 생각했다.
그래도 그 많은 시간과 기름 값을 탕진하면서 수십 번을 오갈 정도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있다.
비록 그들이 연약하지만 형제라는 생각 때문이다.

아버지가 여러 형제를 두었는데
어떤 자녀가 너무 사는 모습이 안됐다.
술과 마약과 담배와 성적 타락으로 망가져 간다.
그런데 좀 믿음이 있고 건강한 자녀가 그 망가진 형제를 기억한다,
아버지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실까?
안된 자녀를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다면 더욱 좋으시겠지......   .
하지만 그냥 찾아가 함께 있어주고
초대하여 밥 한 그릇 함께 먹고
함께 찬양하고 춤추는 밤을 지내는 날을 갖는다면
아버지는 그 자녀를 기뻐하시겠지.
뭐 이런 정도의 생각에서다.

금년 여름에 찾아간 원주민 마을은 MATAGAMI란 마을이다.
철이 든 학생들 8명과 기꺼이 차량과 운전사를 자원해주신 김영해 목사님
원주민 마을에 함께 가보고 싶어하시던 안병한 목사님
박웅희 목사님과 세 명의 새빛 교회 청년들
그리고 한국에서 방문중이신 땅굴 간증을 가지신 안 목사님
이렇게 16명이 장도에 올랐다.
장도라 함은 왕복 3천리 길이기에 하는 말이다.

그 원주민 마을엔 이미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형제들이 있었다.
해밀톤 한인연합교회 김용식 목사님과 교우 여러분들이다.
30년 교회 역사에 적지 않은 풍랑을 잘도 이겨내고 70명의 교우들이 똘똘 뭉쳐 원주민 마을을 섬기고 있었다. 매달 그곳 교회 사역자의 사례비 일부를 후원하고 있다는 말은 벌써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원주민 형제들에게 교회의 전력을 쏟아 붓고 있을 줄은 미쳐 모르던 바였다. 부엌에서 음식을 짓는 10여명의 여성도님들의 모습 속에는 활기와 기쁨이 넘쳐나고 있었다. 16명의 불청객들이 찾아왔으니 짜증이 날만도 한데, 반갑게 맞아 따뜻하게 먹여주고, 잠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이 교회가 축복을 받은 교회로구나' 하는 마음이 밀려왔다.

이번엔 뭐하다 돌아왔느냐고 하면 좀 망설여진다.
역시 별로 내놓을 일이 없어서다.
원주민 형제 집에 여기저기 흩어진 쓰레기를 줍는 일부터 시작하여
교회당 뜰에 나무 한 그루 없는 것을 좀 허하게 느낀 분들이 식수를 해주는 곁에 서서 삽질 몇 번을 해 보았다.
원주민들과 어울려 함께 운동을 하고
밤이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아침에는 저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고
끼니때가 오면, 함께 식사를 하고
틈틈이 저들과 함께 대화를 하고
함께 찬양을 하고
함께 드라마도 보고
흥이 넘치는 사람들은 함께 춤도 추고
며칠 동안 그렇게 지내다 왔다.

우리는 3천리를 다녀온 것만으로 굉장히 많은 여행이다 싶은데
한국에서 오신 분들도 12명이나 되었다.
대부분 경기도 사능교회에서 오신 분들인데
그분들은 기도와 드라마와 워십 찬양을 잘 준비해 오셨다.
한 번 그들에게 공연하고 돌아가시는 것이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어
우리 교회에 오실 수 있느냐 했더니 수요일에 시간이 좋다고 하여서 함께 은혜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을 추진하는 배경에는 원주민 선교에 깊이 헌신하신 오승탁 장로님 내외분이 계신다.
그리고 원주민들을 사랑하는 우리 하나님이 계신다.
먼 하늘을 바라보는 원주민들의 눈 속에 맺힌 눈물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 노하덕칼럼


아들과 함께 앉아 수박을 잘라 먹는다.

"아빠, 왜 나에게 속 부분을 주고 아빠는 껍질 부분을 먹지요?"
"네가 아빠가 되면, 그 이유를 알거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어떻게 우리가 다 알 수 있으랴
내가 죄인되어 사망의 골짜기를 가던 그때
나를 찾아오셔서
그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던 그 크신 사랑을!
아버지가 자녀를 위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위하시는 건 신지상정(神之常情)이다.

52번째 생일을 보내면서
전교인 여름 수련회를 마치면서
서머나 찬양대의 세번째 CD출간  봉헌을 하면서
최풍자권사님 세 손녀딸에게 유아 세례를 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어린이 예배 때면 입을 다물고 침묵하던 어린이들인가 싶더니
어느새 찬양대원이 되어 교회당을 가득 찬양으로 채우고
나이를 초월하여 저마다 성극에 열연하는 성도들을 보면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반문하시던 말씀을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시편 노래가 생각이 난다.

하나님 앞에서 늘 송구스러운 우리 삶의 모습인데
아무래도 과분하기만 한 하나님의 은혜는 오늘도 잔디위에 내리는 봄비처럼 축축이 내리고
나는 송구한 채 서서 하늘을 바라본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아버지이시다.
나같은 죄인까지 이렇게 선대하시다니.....  .

나경수 목사 / 노하덕칼럼

이번 여름 수련회 강사로 오신 나경수 선교사님은 어린 아기를 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아기 때 데려 가셨습니다. 그분은 고아원에 가서 그만한 작은아기를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간 아기를 기르는 마음으로 고아를 길렀습니다. 그 아이는 선교사님 부부의 사랑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자라면서 선교사님 부부의 속을 많이 썩여드렸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소녀를 사랑함으로 이제 매우 착한 소녀로 자라고 있습니다.
저는 나선교사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흔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하시는 것이나 외모에서 좀 어눌한 부분을 보지 않은 바는 아니지만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흔적이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2천년 전 바울이란 분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마세요.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그 인생에 흔적이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처럼 온전할 수는 없지만 부분적으로라도 흔적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어떤 분은 말씀하시는 모습이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어떤 성도는 마음 씀씀이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어떤 성도는 삶의 모습이 예수님을 많이 닮았습니다.
어떤 성도는 행하는 일에서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그것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는 것들이라면 그것이 온전하지 못할찌라도 모두 예수님의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예수님을 닮았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너무 욕심을 부릴 일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보면 모두가 다 부모님을 닮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자녀는 눈썰미가 그 어머니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도 그 자녀가 그 어머니의 몸에서 난 것을 믿습니다.
어떤 분을 보니까 귀뿌리가 그 동생과 닮았습니다.
어떤 분은 뒤통수가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닮아도 그 부모의 자녀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분적으로 주님을 닮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흔적임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경외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아, 이분은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흔적을 가졌구나!'
그리고 그분을 만난 것만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함부로 생각하거나 말하며 괴롭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형제 자매들과 함께 사흘을 지냈습니다. 우리와 함께 같은 방에서 지낸 형제 자매가 예수님을 닮은 말과 마음과 행동을 갖고 있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일로 인하여 감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새로 시작할 날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볼 수 있는 가족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일할 직장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먹을 음식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입맛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대접할 형제가 있어서 행복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진리에 순종함으로, 서로 사랑함으로, 선교와 구제함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교회가 되기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순종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가 그 사람 안에 흐로고 있다는 말입니다.
선교와 구제한다는 말은 예수님의 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생명이 있고
피가 흐르고
몸이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름 수련회 / 노하덕칼럼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말이 있습니다.

    이번 서머나 여름 수련회가 있기 전에도 우리는 서머나 교회 안에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보배들이 많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서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여름 수련회에서 우리는 그 아름다운 보배들이 기도와 연합하여 줄에 꿰어져 주님의 목에 걸리고, 손에 들리우는 모습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러 행사를 진행하는 가운데 아름답게 꿰어지는 모습이  너무 은혜로웠다고 나경수 선교사님은 감동하여 몇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수련회가 시작되는 토요일 새벽에 폭우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시카고로부터 1,000Km를 달려 교회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날은 흐렸습니다. 수련회장에 도착하여 더불 부킹이 되어 있는 수련회장을 보면서 우리 마음은 더욱 당혹스러웠습니다. 작년에 정아영 집사님의 눈꺼풀을 쏘아 우리 수련회 분위기를 흐렸던 그 벌의 후예가 이번에는 수련회장을 열어가시던 정재환 장로님의 눈꺼풀을 쏘았다는 소식을 들으며 가슴이 덜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다음에 이어 부어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전주곡에 불과 하였습니다.

    Welcome! 이용우 형제님이 꺾어 장식한 들꽃들이 식탁 꽃병에서 화안하게 환영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열린 음악회에서 피아노를 치는 은혜와 바이얼린을 켜는 지혜가 한데 어우러져 연주하는 모습은 잘꿰어진 다이아몬드 목거리보다 훨씬 값져 보였습니다.
    이종완 집사와 윤희균 집사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 가 이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몇 번을 들었지만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이었습니다.
    CD에 담겨 서머나 홈페이지에서도 선을 뵐 것으로 생각되는 서머나 보석들의 찬양이 연속적으로 열린 음악회란 줄에 꿰어갈 때, 서머나 교우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병주네 가족의 사물놀이는 깜찍한 초등학생 병주의 열연과 두 누나와 아빠의 환상적인 콤비로 인하여 여러 사람의 넉을 빼 놓을 정도였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성극을 하던 밤에도 놀라운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스스로 각본을 만들어 출연하였던  유초등부 어린이들의 연극은 어른들의 입을 다물 수 없게 했습니다. 연습 시간만 확보되었더라면 굉장한 작품이 나왔을 줄 생각합니다. 특히 호준이의 짜장면 배달 장면은 관객들의 입에서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명 연기였습니다. 너무 짧은 단역이어서 인기상을 놓치긴 하였지만, 그 한 장면 만으로 인기상을 충분히 탈만한 연기였다고 많은 사람이 생각하였습니다.
중고등부의 연극은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버리고 대상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 2세들의 현주소를 밝게 볼 수 있게한 재림하시는 그날의 모습 구현은 그 발랄한 연기의 뛰어남으로 인하여 더욱 감동을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최석호 집사, 윤혁기 장로님의 특수한 배역은 연기가 짱이었답니다.
    대학부에서 구본청 형제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명 연기로 남우 주였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정아영 집사님은 작년 심정적 대상감이긴 하였지만 역시 여우 주연상을 당분간 다른 사람들이 넘어다보기에 버거운 명 연기 속에서 출연하였습니다.

    퀴즈퀴즈 대회에서는 리더 선정에서부터 많은 마음을 기울인 윤희균 집사의 인도로 서머나 보석들을 한 마음에 꿰어갔습니다. 서머나 가족의 대소사를 구석구석 살펴가면서 묻고 답하는 가운데 서머나 가족만이 답할 수 있는 지나간 추억들이 문제 속에 녹아 온 가족이 하나가 되어가게 엮은 생각이 깊은 문제였습니다.

    김상옥 권사님의 선교지 간증, 문봉희 집사님의 하나님과 화목해간 간증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었던 진실 덩어리들이었습니다.

    장병식 형제가 인도한 서머나 가족 한마당은 참가한 온 서머나 식구를 하나로 녹여놓았습니다. 야외를 실내처럼 아름답게 장식한 뜰 안에 뛰기도 하고 돌기도 하고 찬양도 하며 하나로 엮어간 그 솜씨는 경이로웠다고 생각합니다.

    유초등부 주일학교 교사들의 땀을 쏟은 지도는 전도사님이 계시지 않은 가운데서도 그토록 놀라운 열매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경의를 선생님들께 표합니다. John Frankland 선생님, 이지나 선생님, 박준태 선생님, 황혜원 선생님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물론 중고등부 Austin t선생님, Grace 전도사님, 이진숙전도사님께서도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맛있는 음식으로 정성껏 형제들을 섬기신 부엌의 천사님들,
아름다운 음악을 식당 가득히, 서머나 가족의 마음에 가득 담아주신 이종환 집사님,
감사를 드립니다.

이밖에 고마운 분들이 많지만,
우선 하나님께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다 적지 못한 부분을 다른 서머나 교우들의 글에서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천국 준비 / 노하덕칼럼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음씨 좋은 부자가 성실한 노예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는 배 한척을 노예에게 내어주면서 어디론가 가서 자유인으로 살라고 했습니다. 그 배에는 생활 용품과 먹을 것이 가득 실려 있었습니다.
노예는 너무 기뻤습니다 자유를 기뻐하면서 망망 대해를 마음껏 노저어 갔습니다. 하지만 폭풍우를 만나고 말았습니다. 배는 파선되고 모든 것을 잃고, 파도에 밀려 몸만 겨우  어느 이름 모를 섬에 닿았습니다. 그는 해안에 닿자마자 그만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깨어나 보니, 이게 웬 일입니까? 자기가 도착한 섬에는 커다란 도시가 있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도시의 사람들이 자기를 보더니 왕이 오셨다고 크게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얼떨결에 왕이 된 그는 풍요롭고 화려한 생활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꿈만 같았습니다. 그는 어느날 신하 한 사람을 불러서 그 영문을 물었습니다.

'우리는 일 년에 한 번씩 바다를 건너온 사람을 왕으로 모시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그래서 왕으로 모신 것입니다.'
'그럼 일 년 뒤에는 어찌 되는가?'
'1년이 지나면 이 섬을 떠나 저 맞은  편에 있는 죽음의 섬으로 가야 합니다.'
'죽음의 섬?'
'죽음의 섬에는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풀도 없고 동물도 없지요.'

왕이 된 노예는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기쁨의 섬에서 왕 노릇을 하는 동안 틈틈이 죽음의 섬으로 갔습니다. 황폐된 죽음의 섬에 나무를 심고 샘을 팠습니다.
동물과 식물이 살 수 있도록 섬을 가꿔나갔습니다. 밭도 일구고 꽃과 과일 나무도 심었습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습니다. 예정대로 그는 맨몸으로 죽음의 섬으로 쫓겨났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섬은 이제 더 이상 죽음의 섬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생물이 자라고 열매와 곡식이 풍성한 낙원이 되어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부자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노예가 처음 도착한 섬은 인생입니다 . 일년 후에 가야 하는 죽음의 섬은 인생을 마친 후에 가게 되는 저 세상을 생각하게 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까?
준비함으로 깨어 있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재림 / 노하덕 칼럼


재림에 대하여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람이 많다.
반대로 언제 오실 것이라고 단정하여 말하는 사람도 있다.

재림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기 땅에 오신다는 것이 재림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므로
손수 이 세상을 만드신 주인이
당신의 땅에 다시 오신 다기로 이상할 것은 없다.
하실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오실 수 있는 분이시다.
아버지가 아들집을 방문하고 싶을 때, 자유롭게 방문하시는 것처럼.
아버지의 기업을 맡은 아들이나 소작인이 구태여 아버지는 오실 수 없습니다 말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오시면 어서 오십시오 반갑게 맞이하면 될 일이다.

날짜를 정해 놓고 이때에 오실 것이라고 요란을 떠는 것도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날짜를 정해주지 않으시는 것은 우리를 위한 일이다.
나에게 주신 기간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하라는 것이다.
축구경기장에서 뛰는 선수가 끝날 시간만 중요시한다면 좋은 선수라 할 수 없다.
전 후반 90분을 최선을 위해 뛰면 된다.
언제 끝나는 휘슬이 울리건 무슨 상관인가!
경기의 감독되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최선을 다하여 경기장에서 뛰면 된다.
최선을 다하여 뛰다가 감독되신 하나님께서 그만 뛰고 나와라, 경기가 끝났다하면 기쁨으로 나오면 된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주님께서 곧 오시리라 약속하셨을 때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로 화답하며 기다렸다.
그런 신앙에 능력이 있었고
심령도 부흥하고 교회도 부흥했다.

내일 주님이 오신다면.....,  !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당신은 말할 수 있는가?

선교사의 방을 꿈꾸다 / 노하덕칼럼


우리 중에는 꿈을 꾸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도 한 꿈을 가졌습니다.
저는 그 꿈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저의 꿈은 여러분이 꾼 꿈과 많이 비슷합니다.
이 글을 읽어 가시는 분도 하나님의 사람이요, 서머나를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비슷한 꿈을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좀 조심스러운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꿈은 꿈이거든요. 그런데 때로는 꿈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오해를 사는 경우가 있거든요. 요셉의 경우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가졌었고, 그 꿈을 가족과 공유하고 싶어서 말했던 것인데, 형님들로부터 엄청난 오해와 공격을 받아 결국 버림을 받지 않아요? 이런 일은 너무나 슬픈 일인데, 우리 현실 속에서도 존재하기 때문에 차라리 말하지 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꿈은 그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힘이 되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되기 때문에 꿈을 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주신 꿈은 현실 속에서 실현될 수가 있음을 믿기에 우리는 꿈을 꾸기 바라고, 좋은 꿈을 서로 나누길 바랍니다.

제가 어떤 꿈을 꾸었느냐구요?

하하!
즐거운 꿈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꿈입니다.
서머나 가족이 많이 생각할 수 있는 꿈입니다.

그 꿈은 우리의 필요 때문에 꾸는 꿈입니다.
마치 배가 고픈 사람은 먹는 것을 꿈속에서 보는 것처럼 그런 평범한 꿈입니다.

선교사님들이 오실 때마다 계실 곳이 없어 교우 주소록을 펴들고 계실 만한 가정을 찾아 이곳저곳 전화 다이얼을 돌려야만 하는 목회자의 꿈입니다.
빌려쓰는 교회로부터 날아오던 경고 장을 수없이 받으며 나가라고 하면 어떡하나 덜컹거리던 심장이 안정되기를 바라는 교회 지도자의 꿈입니다.
교육 공간이 부족하여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매는 사역 자들의 방황이 그칠 날이 오기를 바라는 교육 책임자의 꿈입니다.
마음껏 기도할 공간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어느 권사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자의 꿈입니다.
메노나이트의 역사를 아담한 집에 구현시겨 놓은 St. Jacobs 마을을 다녀오면서, 그리고 시카고 빌리그레함 센터에서 예수님의 생애에서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의 날까지를 작품화해놓은 모습을 보고나서 우리들의 꿈은 더욱 영글어 갑니다.
캐나다에서 우리 한국에 185명의 선교사님들이 사역하신 것으로 아는데, 그날로부터 우리가 오늘날 165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모습을 그 선교 교육관에 재현시킬 수는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부유하신 분이신데, 우리 가운데 얼마든지 크고 비밀한 일을 이루시길 원하시는 분이신데,
그것도 우리 안에서 그 일을 이루시기 원하시는데
우리는 우리 현실의 곤고한 것만을 생각하고 기도에 태만한 것은 아닌가?
아예 꿈조차 꾸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긴급한 소원들을 구체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며 사는 것이 더욱 신앙적인 자세가 아닌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기도응답은 새로운 시작/ 노하덕칼럼


인생에 흑암이 깊이 드리울 때, 사람들은 흑암을 밝혀줄 세상을 찾습니다.
인생이 공허할 때, 사람들은 공허함을 채워줄 세상을 생각합니다.
인생이 혼돈스러울 때, 사람들은 질서를 줄 세상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세상은 세상일 뿐, 빛을 주지 못합니다.
스포츠가 건강을 위함 도우미처럼 각광받지만 우리 인생을 빨아들이는 속성도 있습니다.
T.V.나 인터넷이 정보를 풍부하고 신속하제 제공하지만 우리 시간을 빨아들입니다.
돈이나 권력이 인류 역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빨아 마셨습니다.
나봇의 조상들은 왕을 세워
그 포도원을 복지로 보존해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라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빨아들일 뿐이었습니다.

어두움에 거하는 자에게 정녕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빛입니다.
공허한 인생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충만입니다.
혼돈스러운 인생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채워주십니다.
그 나라와 의로 채워주십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기도는 이 놀라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목마른 사람이 시냇물을 찾듯이 그 나라와 의를 갈망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망하는 기도자를 채우십니다.

그러나
기도가 응답될 때
많은 사람들은 마침표를 찍습니다.
응답을 위해 기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응답을 받았으니 끝났다
또다른 제목으로 기도하자 이럽니다.
하지만 기도 응답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누군가의 기도가 응답되어
사울이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누군가의 기도가 응답되어
다윗이 왕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직은 그들의 시작이었습니다.
좋은 시작입니다.
사울에게 왕직이 마침표가 되었을 때, 그것은 축복일 수 없었습니다.
다윗에게 왕직이 시작이었을 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기도 응답은 만능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일 뿐입니다

이 놀라운 기도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 응답을 풍성히 받아
새로운 인생을 세우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기도 응답은 분명 기쁜 일입니다.

겨울 연가와 죽음같이 강한 사랑 / 노하덕칼럼


        요즈음 일본에서는 '겨울 연가’란 드라마가 한류 열풍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겨울 연가의 주인공 배용준이나 최지우가 누리는 인기는 일본 수상까지 부러워하는 발언을 낳고 있습니다. 그 배우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작품을 촬영한 장소를 보기 위해서 관광객이 줄을 이어 몰려옵니다.
          저는 이 겨울연가란 작품을 살펴보면서, 이 작품이 인기를 끌고 있는 까닭은 겨울 연가이기 때문이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겨울연가는 봄의 연가가 아닙니다.
여름 연가는 더욱 아닙니다.
제목 그대로 겨울 연가입니다.
겨울 인생을 맞아 시리도록 쓸쓸한 길을 가는 주인공들은 고집스럽게 겨울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추운 겨울 거리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그 사람을 그냥 두고 떠날 수 없어하는 마음, 외길로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는 사람에게 위태할 때 손을 내밀어 잡아주는 그 마음이 훈훈합니다. 겨울 바람 앞에 떨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사랑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개인의 모든 영화를 뿌리치고 달려가던 남자 주인공(배용준)을 끝내 기억상실에서 구원합니다. 장인이 되어 겨울을 살게된 남 주인공 곁에 서는 여주인공 또한 따스합니다. 이런 남여주인공들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래, 사랑이란 저런 거야. 겨울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저런 순수한 사랑에서 나오는거야!'
이렿게 생각하게 됩니다. 추운 겨울이기에 그 때마다 현실 속에서 그들이 겪는 추위는 견디기 힘들지만, 결국은 저들의 사랑이 겨울을 녹입니다.
          일본, 하면  음란문화가 판을 치는 나라라고 하는데 사실은 그 백성들이 음란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겨울 속에서도 피어나는 사랑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가 날아드는 나무는 여름나무입니다. 새들은 잎이 있고 열매가 열린 나무에 날아와 쉬고 노래를 합니다. 그러다 겨울이 와서, 잎도 떨어지고, 열매도 없으면 새들도 그런 나무를 떠나갑니다. 세상 사람들도 이와 같습니다.  겨울이 오면 떠납니다. 현대 젊은이들이 배우자를 결정할 때, 사랑을 가장 귀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 현실 속에서는 여름의 무성한 잎이 달린 가지를 보거나, 가을의 주렁주렁 열린 열매를 보고 결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이보다 훨씬 강한 겨울 연가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경건치 않았을 때에, 연약할 때에, 우리가 겨울 속에서 얼어죽어 가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참 빛으로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참으로 추운 겨울에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겨울 앞에 얼어죽어 가고 있는 여인으로부터 다 떠나 갔습니다. 그 여인을 보듬고 사랑한 것 같더 그도 떠나갔습니다. 대신 수많은 사람들을 겨울에 선 여인을 향해 돌을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막는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리고 겨울 속에서 떨고 있는 우리를 찾아 오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같이 강한 사랑'(아가서8:4)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외아들의 죽음같이 강하셨기에 '죽음같이 강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당한 무서운 겨울, 그 좋은 천국을 버리고 우리를 찾아와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의 겨울을 완전히 녹이셨습니다. 할렐루야!‘이런 마음으로 주님께서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죽어 가고 있는 날 위해 외아들을 죽음에 내어 주신 사랑은 가장 강렬한 겨울연가입니다.

하프타임에 / 노하덕칼럼


           '저는 하프타임에 있습니다'

           운동경기에서 전반전을 다 마치고 후반전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는 그런 하프타임 말입니다. 이 하프타임에 우리의 감독이신 하나님의 작전을 잘 듣고 그 작전대로 실행하면 후반전에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비록 전반전 인생을 잃어버렸을지라도, 하나님의 작전을 잘 숙지하여 그분의 작전대로만 경주하면, 후반전엔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습니다. 정 경철 선교사님께서 선교보고 중 하신 이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반환점을 돌아가는 마라토너에 우리를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마라톤을 하는 주자는 내가 어느 지점을 가고 있는가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라토너가 전반부 경주를 다하고 반환점에 들어섰다는 것은 의미가 깊습니다.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전력을 다 쏟아 경주합니다. 최후의 한 방울까지 땀을 다 쏟습니다.
          운동 경기의 후반전을 앞에 두고 하프타임을 갖는 중이건, 마라톤의 반환점을 돌아가는 중이건, 이미 나의 경주는 내리막을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의 마지막 지점, 말세지말을 달려가고 있는 이 세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후반전에 기회를 가진 선수들에게는 부름 받은 이 사실이 가슴 설레는 일에 틀림 없습니다.

          어떻게 경주할 것인가 !

하나님의 본능 / 노하덕칼럼


네 인생의 짐이 너무 버겁거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신 주님 앞에
피곤한 심신을 내려놓으라
자녀에게
쉬임 주시는 건
하나님의 본능

몸이 병들었거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주님의 손 밑에
그 상처를 맡기라.
불치의 병이라도
치료하시는 건
하나님의 본능

마음이 청결한 자로 살고싶거든
제자들의 발 씻기시던 주님의 대야에 더러워진 부분을 잠그라.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시던 주께서
자녀의 죄를 씻기시는 건
하나님의 본능

자신이 너무 작아
무용지물로 생각되거든
오병이어를 축사하시던 주님의 손 아래 올려 놓으라.
40년이든, 5천명이든 감당할 능력 주시는 건
하나님의 본능

세상 외로움이 너무 무정하게 너를 흔들거든
주님의 품을 찾으라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
자녀를 품어주지시는 건
하나님의 본능

너 슬플 때
막히고 상한 현실의 벽 앞에서
절망의 그림자를 만나거든
네 곤한 마음을 주님께
쏟아놓으라.
네 영혼의 피할 바위 되심은
하나님의 본능

너,
하나님의 사람아,

우리 하나님
그분의 본능이 그리운 품이어라.

참 이상한 헌금 / 노하덕칼럼


프랑스 어떤 교회에서 '선교의 날'을 정하고 헌금을 했다.
헌금자 중에는 놀랍게도 가난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끼어 있었다.
그것도 거금 27프랑이!

놀란 목사님은 소경 된 부인을 만나서 조용히 물었다.
"생활도 어려우신 걸로 아는데, 어떻게 그 많은 헌금을 하셨나요?"
"저에겐 물론 많은 액수이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절약할 수 없는 부분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
"네?"
"사람들은 저녁 등불을 켜는 데 한달 경비가 27프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소경인 저는 등을 켤 필요가 없쟎아요? 이렇게 헌금함으로 하나님 은혜에 보답하게 되었습니다. "

기독교 밖에 있는 분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헌금하는 부분이다.
교회를 다니며, 예수님을 믿으면 축복을 받는다네, 하는 분들 가운데도
헌금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눈빛이 변하는 경우가 있다.
거기에 '온전한'이란 수식어까지 붙어 '십일조'란 말이 성경에 적혀 있으니 속이 메스꺼울 법하다.

그러나 굳이 록펠러 같은 사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장 귀하게 애용하는 성경 말씀 가운데 말라기 3장 10절이 회자되고 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내 소득을 10으로 하면 그 중 1/10을 하나님을 위해 구별하여 바친다는 말이니
10/10을 쓰고도 늘 쪼들리는 삶의 나날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리 후하게 생각해도 하나님께서 잘못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부담를 안고 있는 이 말씀이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하나님 백성의 혈관을 힘차게 돌고 있는 이유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역설만큼이나 성도들 삶에 열매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내 안에 이루신 의,
그 위에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그분의 사랑,
영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믿음

이런 축복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십일조가 더 이상 장식이 아니라 보석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고후8:9)

은사 받은 분도 많고, 가진 것도 많은 고린도 교회가 건강을 잃고, 분쟁과 시기에 요동칠 때, 바울 사도께서 제시하신 처방이 바로 이 헌금이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후8:12)

의도 신도 믿음도 빠진 종교인들의 외식적 십일조 생활을 통렬히 비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렇게 마치시고 계신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 / 노하덕칼럼


원래 소는 고집이 센 짐승입니다.
거기에 힘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소를 제어할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의 힘을 사용하기 위해 코를 뚫어 거기에 멍에를 끼워 사용합니다.
그 멍에를 끌어당기면 코가 찢어질 것처럼 아프기 때문에, 사람에게 억지로 끌려서 순종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는 아직 멍에를 매어보지 아니한 암소입니다.
이 암소에겐 인간적 제어 장치가 없습니다.
소를 제어하기 위한 강압장치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멍에를 매어보지 아니한 암소입니다.
코가 꿰어 억지로 끌려가는 소가 아닙니다.

하지만 암소는 울고 있습니다.
젖 먹던 송아지를 방금 떼어놓고 나왔기에 웁니다.
철철 젖이 흐르나 먹일 송아지가 없기에 웁니다.
억지로 떼어놓은 어린 송아지를 뒤로하고 가자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 웁니다.
사랑하는 새끼와 떨어지기가 싫어서 웁니다.
자기 몸으로 낳은 송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웁니다.
어린 새끼와 함께 있고 싶어서 웁니다.
새끼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웁니다

그러나 울망정 뒤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 점을 노리고 일부러 돌아설 수밖에 없도록 이런 어린 송아지를 가진 암소를 선정한 것입니다.
돌아오라고
일부러
새끼가 딸린 암소를 고른 것입니다.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나  그런 암소를 고른 것입니다.
그런데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 다 , 울면서도 돌아서지는 않습니다.

순종이란 걸 안다는 듯
반항하지 않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벳세메스를 향해 똑바로 가고 있습니다.
왼쪽으로 돌 수도 있고 오른 쪽으로 돌 수도 있을 법 한데
좌우 어느 쪽으로도 한눈을 팔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길로도 빗나가지 않고 벧세메스를 향하여 갑니다

그 소들이 특별히 훈련을 받았겠습니까?
그렇게 가도록 하늘이 낸 소들이겠습니까?
아니지요.
그들 본성으로 하자면 한 걸음도 그렇게 나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그 소들을 강권하시니 그렇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법궤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까지  가는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피땀을 흘리시며 가시던 그 고난의 종처럼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는 울면서 갔습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이 살을 깎는 것처럼 아프셨습니다.
베드로의 세 번에 걸친 부인이 등을 찔렀습니다.
모욕하는 군중들의 외침이 귀를 찢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의 무지막지함
동족인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악한 음모술수
몸이 찢기고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 찢기는 아픔에
예수님은 우시면서 골고다를 향하셨습니다.

결국 암소는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백성의 죄를 지시고 나무에 달리셨습니다.

'엘리~~~~~~~~~~~~~'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을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오늘도 벧세메스로 가는 암소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본이 되셨던 스승 / 노하덕칼럼


       저는 학창시절에 본이 되시는 국어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장로님이셨던 그분은 언행이 참 조용하시고 인자한 분이었습니다. 그분을 바라보면서 저는 국어를 공부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청년 시절을 국어선생님으로 쓰임 받았습니다.
        강 신항 교수님은 성실과 제자에 대한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신 스승이십니다. 제자에 대한 사랑과 성실은 저만 누린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진솔한 생애를 담담한 필치로 적어 수필집으로 출판하시곤 하셨습니다.
        저는 목회의 길을 가면서도 본이 되는 몇 분 목사님을 만날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제가 새벽기도회를 존중하는 마음은 김 명혁 목사님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그분은 참 바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도 꼭 새벽기도회에 나오셨습니다. 어느 날 새벽, 그분이 기도하는 내용을 본의 아니게 듣게 되었습니다. 그냥 교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의 길에 들어서서 오늘날까지 목회자는 새벽에 나와 하나님 앞에 교인들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존재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월삭기도회, 즉 매월 첫 날 새벽을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회도 그분께 배운 기도입니다.
       캐나다에 처음 도착하여 사역한 교회가 중앙교회였습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시던 김은대 목사님은 헌신적인 분이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사역하던 어느 날. 우연히 저는 그분이 낸 선교헌금 봉투를 보았습니다. 상당히 넉넉하게 선교헌금을 하고 계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좀 놀랐습니다. 그후로 저는 헌금 생활을 좀 넉넉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계화삼 목사님을 만나고 그분의 생애를 정리하면서 받은 본은 청빈과 헌신입니다. 계목사님은 새벽 기도를 가시다 교통사고를 당하셨는데 그 보상금을 교회 교육관 건축헌금으로 내놓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중국을 함께 방문하는 기회를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제가 받은 느낌은 청빈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의 수준에 여러모로 미치지 못하지만 그 방향을 바라보고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반면 교사가 되신 분도 계십니다. 어떤 목사님은 굉장히 박식하셔서 어떤 모임 자리에만 가면 대화를 독차지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그분을 그렇게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말재주도 없지만, 사석에서는 세상 이야기를 가급적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분은 저의 반면 교사가 되신 셈입니다.        

   이런 분들을 생각하노라면, 참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내 생애에서 가장 감사한 분은 역시 나를 위해 나무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십니다.
'유대인의 왕'이란 푯말은 분명한데 실상은 벌거벗김을 당하신 채 나무에 매달려 계십니다.
만왕의 왕의 실상은 온 인류의 죄와 고통을 대신 당하심입니다.
이름은 분명, 나의 왕이신데 내용은 나의 가장 수치스러운 부분을 뒤치다꺼리하고 계시는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생각할수록 놀라운 본이십니다.

           양무리의 본이 되라는 말씀이 그림으로 내 심비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기에 .... . / 노하덕칼럼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기에 그분을 만난 사람들은 세상을 이기는가!'

송명희 시인
그녀는 고백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사람들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자신에게는 소중한 보석이 되었다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기에 ....  .'

코리텐 붐과 친족을 밀고함으로 죽음의 포로 수용소에 보낸 자,
그녀의 친족들을 끝내 사망으로 마침표를 찍게 한 자,
그들 외에도 수천 명을 독일 나치 정권에 넘긴 두 폴란드인이 전후에 잡혔다.
그리고 총살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코리텐 붐은 그가 아는 사람들과  방송국에 연락하여 그 두 사람의 사형수를 위해 기도해 주도록 호소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그 중 한 사람으로부터 답을 얻었다.
“당신이 나를 용서하고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살아 계신 증거라고 믿습니다. 나는 당신의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기에.......   .

엘리엇과 그 친구들은
살기 등등한 아우카족에게 그 소중한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가?
그리고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그 남편을 이어 사지로 뛰어들 수 있는가?

끝내는 저들을 복음화한 그녀는 '영광의 문'이란 책에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다.

"다섯 남자들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아낌없이 자신을 바쳤다.
자신들이 아는 한 그들은 평범한 선교사였다.
로져는 앗슈리아족에게
짐과 에드와 피트는 키추아족에게
네이트는 비행기로 정글 전 지부를 섬기는 일에 보냄 받은 보통 선교사였다.
그들은 아우카 족이 살고 있는 집 몇 채를 발견했다.
작은 결정들이 내려지고, 그것은 더 큰 결정들로 이어졌다.
아우카족에 들어가는 문제를 놓고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결국 한 남자의 개인적 선택은 중대한 고비에 이른다.
사랑하는 처자식을 둔 평범한 보통 선교사들이 생사가 달린 결단에 직면했다.
아우카 부족의 필요가 단순히 그들의 절대명령이 되었던 것이다.
그토록 하나님을 방패와 방벽으로 믿었던 그들이 왜 창에 찔려 죽도록 방치되어야 했는지,
우리들에게 그것은 최종적으로 답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들의 생애를 들으며 우리는 한 근본적인 질문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기에 ....  .'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가까운 곳에 늘 머물렀던 수제자 사도 요한을 통해 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요일 5:5)

제 3의 인생과 사랑이야기 / 노하덕칼럼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제2, 제 3의 인생을 살아보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져간다.
     부모님 품에서 태어남으로 시작되어 성장을 거듭하던 제1의 인생,
미끄러운 죄의 길에서 허둥대는 제 2의 인생 여기가 전부인 줄 안다. 결국 사망의 낭떠러지까지 떨어져 간다.

  죄 가운데 빈둥거리던 홉니와 비느하스 형제처럼.
그들에게는 백 약이 무효였다.
마지막 희망이던 언약궤는 빼앗겼고
한없는 나락으로 그 영혼이 추락해갔다.
그 소식을 접한 그의 아내는
갓 태어난 그의 아들을 보며 이렇게 부르며 죽어갔다
'여호와의 영광은 떠나갔구나!'

      그러나  아니다 제 3의 인생이 있다.  사랑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을 때, 사람들은 아름다워진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사랑이 찾아올 때  그의 눈동자는 빛난다.
         겨울 나무들이 봄이 오면 아름다워지는 것처럼,  사람에게 사랑이 깃들면, 아름다워진다. 죄로 찌들어가던 사람도 사랑이 들어오면 아름다워진다.

  사무엘은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손에 놓임으로 그분의 사랑 안에 접목되는 복을 받았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제 2의 인생을 살던 사무엘은 언약궤 곁에 늘 자리를 폈다.
등대의 기름을 채우고 때로는 등잔의 심지를 돋우며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
작은 일에도 감사의 비석을 세우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생각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고

그가 머무는 성소에는 늘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였다.

         하나님을 알고, 그 사랑에 접목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여호와의 영광이 머무는 제 2의 인생을 살게 된다.

      캐나다에 페드스톤이라는 신실한 믿음의 자매가 있었다. 그녀의 혀에 암이 걸렸다. 그 혀를 절단해야 남은 몸이 살 수 있다. 그 혀를 절단하기 전에 의사가 묻는다.
잠시후면 당신은 혀를 절단하게 됩니다. 이젠 더 이상 말을 못하게 되요. 당신의 혀가 있는 동안에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이웃에 접목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제 3의 인생을 살게 된다.

     John D. 록펠러(Rockefeller)는 50대에 벌써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서운 질병으로 그의 신체는 철저히 망가지고 있었다. 머리는 다 빠지고, 팔순 된 할아버지처럼 시력은 나빠지고 있었다. 많은 돈을 가졌지만, 자기가 하루 종일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우유 한 컵과 토스트 반쪽에 불과했다. 의사들은 모두 손을 들었다. 그는 더 이상 생명을 지탱할 수 없는 것으로 알았다. 언론사에선 그의 사망 기사를 만들어 놓았고, 죽는 순간 특종기사로 다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휠체어를 타고 병실을 이동하다 병원 로비에 걸려 있는 액자 속의 성경말씀을 보았다.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복되다"

그리고 병원 한쪽에서 입원비가 없어서 병원 측으로부터 거부당하고 있는 환자를 보았다. 그는 본인 몰래, 그 가난한 자매를 위해 치료비를 지불해주었다. 이로 인해 그 환자는 치료를 받고 나음을 입었음은 물론이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그는 이웃과 연결된 제3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오늘내일 하던 그는 놀랍게도 90이 넘도록 살았고, 그의 도움을 받은 가난한 이웃들은 늘어만 갔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 연결된 제 2의 인생을 나무의 뿌리라고 비유한다면 이웃과 연결된 제3의 인생은 나무의 가지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표지로 세우신 십자가는 이런 면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잘 연결시킨다. 수직적인 하나님의 사랑과 수평적 이웃을 향한 관심이 십자가에 어우러져 있다.

사막에서 물을 나그네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생수의 근원을 확보한 사람일 것이다.
누가 이 사막 같은 세상에서 나그네 된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확보한 사람일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7-11)

주님의 세상 누리기 / 노하덕칼럼

           어떤 임금이 선행을 행한 농부에게 상을 주려고 불렀다.
임금님은 그 농부를 데리고 나가 넓은 땅을 보여주었다.
“한 시간 동안 이 땅에 네가 원하는 만큼 원을 그려라. 내가 그 땅을 네게 주겠노라”
그런데 말이 떨어지자마자 큰 원을 그리기 위해 뛰쳐나갈 줄 알았던 농부는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이내 자기가 서 있는 땅에 조그만 원을 그렸다.
의아한 쪽은 임금님이었다.
“좀 더 크게 그릴 것이지 그렇게 작게 그렸느냐?”
그 농부는 태연히 대답했다.
“ 아닙니다. 저는 원 안이 아니라 원 밖의 땅을 바라고 그린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아의 원을 그려두고 그 안에 자기 세계를 담고 산다.
자신만의 철학을 그 원 안에 담고 산다.
자신만의 경험을 그 원 안에 담고 산다.
자신만의 지식과 부와 명예를 그 원 안에 담고 산다.
그리고 그 안의 것을 유지하는 일에 생명을 건다.
그 안의 것을 풍성하게 하는 것을 성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원 밖의 세계를 구하길 원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원 안에 있는 자신의 나라와 의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원 밖의 세계를 누리라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그릴 수 있었던 동그라미 안의 세계를 조카 롯에게 양보하고
자기 원 밖의 하나님께 속한 그 땅을 동서남북으로 거닐었다.
그러다 그의 원 밖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꿈에 동참했다.

한 알의 밀알은 땅에 심겨지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는 밀알일 뿐이다.
그러나 원 밖에 있는 하나님의 땅에 그 밀알이 심겨지고 썩을 때,
자기 원 안의 세계는 끝난 것 같지만
원 밖에서 싹이 돋아나고 줄기가 생기며 꽃이 피고 이내 열매를 맺게 된다.
썩어질 원 안의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원 밖의 것으로 사는 것이 부활이다.

광야를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 안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원 밖에 장대를 세우고 그 위에 놋뱀을 매달았다.
바라보아라. 저 장대 위의 놋뱀을 바라보아라!
원 안의 자기를 접고, 원 밖의 놋뱀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몸에서 독이 빠져나갔다.

원 안에서 죄를 범함으로 침몰되어가던 우리 인류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원 밖에 십자가를 세우시고
외아들을 매달아 놓으셨다.
성문 밖의 나무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저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날은 나의 원 안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는 날이다.
           세상에서 가장 기쁜 날은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는 날이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하리라시던 주님께서
그를 높이셨으므로
사무엘이 머무는 성소에는 늘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였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던
사무엘의 원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였다.

내 인생의 꽃, 부활의 그날 / 노하덕칼럼


큰 가뭄이 왔다.
큰 저수지에 담긴 물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열길 되던 물이 다 빠져가고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바닥에서 살고 있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바지를 걷어붙이고 뛰어들어 잡는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속옷 바람으로 고기를 잡는 사람, 굉장하다.
어떤 사람이 이 광경을 본 후, 총총걸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오래된 그물을 꺼내어 손질하기 시작했다. 한 나절이 다가도록 손질했다. 궁금한 그 부인이 용도를 물었다. 사정을 들은 부인의 볼이 붓는다.
그렇게 꾸물거리다가는 다른 사람이 고기를 다 잡아가겠다고.
해가 뉘엿뉘엿해서야 다 기운 그물을 들고 그는 저수지로 향한다.
그리고 너무 깊어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접근하지 못한 곳에 그물을 내렸다.
엄청나게 큰 고기들이 그물에 가득 담겨 올라 왔다.

고기를 잡을 줄 아는 사람에겐 저수지 하나도 이렇게 아는 사람이 복이 있다.
하물며  하나님을 알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받겠는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6:3)


사두개인들에게는 명예가 있었는데,
왜 100년 된 고목에서 피어나는 꽃은 볼 수 없었을까?
그들에게는 부요함이 있었는데,
왜 팔 때마다 솟아나는 우물이 없었을까?
그들에게는 건강이 있었는데,
왜 그들이 정작 올라가야 할 하나님의 사닥다리는 없었을까?

오랫동안 그 사회의 높은 지위를 독점하고 살았는데,
헬라가 온 세상을 다스리던 때도 줄 건 주고 얻을 건 다 얻고 살았는데,
독수리처럼 표독스러운 로마가 통치할 때도 기득권만은 유지할 수 있었는데,


그들의 한쪽 가슴은 늘 텅비어 있었을까?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
그들의 조상 이삭이 파는 곳마다 솟아 나오던 우물,
그들의 조상 야곱이 세워두고
'크도다  이곳이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던 돌베게

왜 이런 행복이 없었을까?

아브라함은 외로워 보이는  나그네였으나
고독보다 더 큰 기쁨이  있었고,
이삭은 가는 곳마다  우물을  메우는  원수를  만났으나
덮는 현실보다 더  힘차게 솟아 나오는 생수가 있었고,
야곱은 생명을 노리는 형제의 위협이 있었으나
'크도다  이곳이여!'
살아있는 예배가 있었고.
현실에선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했으나
하나님 나라의 넉넉함이 있었는데.....   .


우리에게는 명예만 잎처럼 무성하고,
100년 된 고목에서 피어나는 소망의 꽃은 이리 보기 힘들까?
왜 우리에게는 욕심만 가시덩쿨같이 자라고
솟아나는 용서의 우물이 없을까?
왜  우리에게는 건강이 넘치는데,
정작 올라가야 할 사랑의 사닥다리는 없는 걸까?

내 인생의 꽃은
참된 부활의 그날,
생수의 근원이신 부활의 주님을 잊고 살아가는
아 ,
오늘의 사두개인이여!

이런 교회이기를 / 노하덕칼럼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날은 당신의 성전에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는 날이다.

죄 가운데 살던 비느하스에게는 백약이 무효였다.
마지막 희망이던 언약궤는 빼앗겼고
한 없는 나락으로 그 영혼이 추락해갈 때
그 소식을 접한 그의 아내는
갓 태어난 그의 아들을 보며 이렇게 부르며 죽어갔다.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구나!'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기쁜날은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는 날이다.

언약궤 곁에 머물던 사무엘은
등대의 기름을 늘 채우고 때로는 등잔의 심지를 돋우어 주고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았다.
작은 일에도 마음에 기념비를 세우며
에벤에셀이라 적곤 하였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고.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하리라시던 주님께서
그를 높이셨으므로
그가 머무는 성소에는 늘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였다.

참 좋은 분을 만났어요 / 노하덕 칼럼


           1930년대 대공황이 아메리카 전대륙을 휩쓸고 지나가던 때의 일이다.
일터를 잃은 수많은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절망의 늪을 지나고 있었다.
붉은 색 머리로 인하여 레드로 불리는 제니,
그는 어릴 때 승마를 배울 만큼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렇지만 1930년대의 경기 공황으로 생계조차 이어갈 힘이 없게된 부모님이 그를 경마장에 두고 떠난다. 그는 돌아오겠다는 부모님의 약속을 기다리면서 그는 고아처럼 외롭게 자란다. 구태여 직업을 말하라면 오기만 가득찬 승마사다. 승마사라지만, 제대로 훈련을 받은 적도 없어서 몇 차례 대회에 출전해본 것이 전부다.

'비스킷',
이는 경주용 말 이름이다.
조상은 스무 차례나 경마대회에서 우승할 만큼 명마였지만, 막상 자신은 경주용으로 쓰임받기에는 너무 체구가 작다. 경주에 맞게 길들여 지지 않아서 중구난방으로 뛰나 우승은 할 것 같지 않은, 성질만 고약스런 말이다. 조련사의 눈에는 '경주가 무엇인지 모르는 성에 차지 않는 말'이다.
이 두 존재가 좋은 주인(하워드)과 조련사(챨스)를 만나 그들의 초대를 받는다. 늘 마구간 곁에서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그들이 남겨주고 간 책을 읽곤 하던 레드는 좋은 주인의 상에 앉아 함께 먹는 선대를 받게 된다. 그리고 따뜻한 주인의 배려와 좋은 조련사의 훈련을 통해, 결국 미국 승마계를 제패하는 개가를 올린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 레드란 승마사는 사고로 다리가 부스러지고, 비스킷이란 말은 인대가 상하여 안락사를 시킬 수밖에 없는 처지에 떨어진다. 기우는 달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처럼 그들의 잘나가던 인생도 마침표를 찍어야 할 형편이다
인대가 상한 말, 그래서 안락사를 시켜주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되는 그 절망,
사고로 다리를 바삭바삭 부서진 상태에서 겨우 걷게 된 레드란 승마사
이 둘이 치열한 경마세계에서 살아날 길은 없어 보인다. 아무도 그들에게서 다시 우승이란 행운을 기대할 수 없다. 온 집안 주변에 구름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바라본다.
그리고 서로의 아픔을 이해한다.
주인의 따뜻한 배려와 보살핌을 받는다.
그 동안 쉴 틈 없이 달려왔던 경마장을 떠나, 푸른 초장을 절룩거리며 걷기도 하고 그 잔디밭에서 쉼을 갖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인대가 상했던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던 그 말이 회복되어 초원을 달리게 되고
그 곁에서 절뚝거리며 걷던 승마사 레드는 받침대를 발에 붙이고 말 위에 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함께 달리기 시작한다.
종국에는 자기들과 같이 절망과 좌절의 늪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는 수많은 서민들의 환호와 응원 속에 경마장에 다시 선다. 그리고 그들의 재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친구 경마사의 격려를 받으며 당당히 우승의 감격을 누린다.
'씨비스킷'이란 영화 마지막 장면은 이런 문장으로 끝난다.

우리가 녀석을 치료했던 것이 아니다.
사실은 그가 우리 모두를 치료해준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서로가 서로를 치료해준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세상에 태어났을지라도
죄와 경건치 않음과 불법을 범하고 망가져가던 나를
하나님께서 불러주시고
그 보혈의 은혜 아래서 자녀됨을 회복하게 하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되는 지혜를 생각나게 한다.

좋은 주인을 만나라
그분의 훈련 프로그램에 순종하라

축복된 말, 열리는 자녀 / 노하덕칼럼

        많은 사람들이 감명 깊게 보는 영화 가운데 '포레스트'라는 영화가 있다.
         포레스트 검프의 아이큐는 75다
양다리에 척추 보조물을 달고 그것을 의지해야 걸어다닐 수 있는 아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어릴 적부터 친구가 없다.
늘 왕따를 당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를 사랑하는 어머니가 계셨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평범하지만 소중한 말을 듣는다.

           “너는 남과 다르지 않다. 저능아란 단지 다른 사람보다 지능이 좀 모자라는 것뿐이란다.”

         어머니의 백방 노력으로 정상적인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그의 학창시절은 고통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를 생각해주는 제니란 이웃이 있어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날도 그는 다른 아이들로부터 놀림과 심한 구타를 당한다. 그때 이를 안쓰러워 하는 제니로부터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포레스트, 달려! 무조건 달리란 말야!”
무거운 척추 보조물을 달고 있는 그가, 신체가 온전한 그 아이들로부터 벗어날 만큼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생각되었지만, 제니의 눈빛이 그와 마주치는 순간 있는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달린다. 그러나 아이들의 집요한 추격은 그를 바짝 따라 잡는다. 그때, 제니로부터 다시 한번 소리를 듣는다.

“포레스트, 뛰어, 더  빨리 뛰란 말야!”

그 감동어린 사랑의 음성을 듣는 순간 그는 더 힘차게 뛰기 시작한다. 운명처럼 달려있던 척추 보조물도 떨쳐버리고 번개처럼 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 사건을 기점으로하여 달리기는 그의 구원의 도구가 된다.
미식 축구 운동 경기장을 가로질러 도망치던 그는 이내 미식 축구 선수로까지 발탁이 되어 달리게 된다.
군인으로 월남에 파병되어 뛴다.
새우잡이 선장으로  뛴다.
칙칙한 그의 모든 과거는 달음박질하는 그의 뒤편에 사라져간다.
그를 소중히 여겼던 어머니와 제니란 두 사람의 사랑이 기폭제가 되어 그는 절뚝거리던 저능아에서 달리는 인생으로 우뚝 서게 된다.

           록펠러에게 그를 사랑하던  어머니가 10가지 유언을 남겼다.

1. 하나님을 친 아버지로 섬겨라
2.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잘 섬겨라
3. 주일 예배를 꼭 본 교회 와서 드려라
4. 오른 쪽 주머니는 항상 1/10주머니로 삼아라
5. 아무도 원수를 만들지 마라
6.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7. 저녁 잠자리에 들 때는 반성하며 기도해라
8. 아침에는 하나님 말씀을 읽어라
9.남을 도울 수 있을 때는 힘껏 도와라
10. 예배 시간에는 늘 맨 앞자리에 앉아라

9세에 점원노릇을 했던 사람인데 중년에는 벌써 세계 제일의 재벌이 되어 있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친 면에서도 단연 재벌다웠다.
그를 사랑하신 어머니께서 남긴 신앙의 열매였다.
이와 같이 축복해주는 말에는 열리는 열매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에도 이런 복된 열매가 있거든 하물며 사랑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에 있어서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말씀을 따라가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그 말씀 듣고 순종하였던  베드로,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
는 말씀을 안고 아프리카에 참 빛을 심은 리빙스턴,
축복된 말씀을 받을 때마다 자녀의 인생은 열린다.
*****

어떤 부모가 헬라 교사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교육을 시켜야 합니까?
몇 살입니까?
두 살입니다.
2년이 늦었네요.
어릴 때부터 하나님 말씀을 듣도록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축복된 말씀의 열매는 어릴 때부터 맺히기 시작한다.
우리는 돌에 어린 새의 발자국이 있는 것을 볼 때 신기하다.
돌이 굳어지기 전에 앉았던 작은 새들의 발자국이다. 지금은 망치로 때려도 끄덕 없는 돌인데 말이다. 그래서 교육이란 어릴 때 해야 효과가 있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축복된 말씀을 전하라
머지않아 그의 인생이 열리는 모습을 보는 기쁨을 누릴 것이다.

값진 인생 그려 넣기 / 노하덕칼럼


       
          왕처럼 귀한 취급을 받는카드가 있다.
쓰레기 취급을 받는 카드도 있다.
같은 값으로 만들어진 카드인데 값은 천차만별이다 .
그 안에 어떤 그림이 그려 있느냐 이것이 값을 결정한다.

          왕처럼 존귀하게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
거지처럼 취급을 받고 사는 사람도 있다.
다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인데 대접을 받는 건 천차만별이다.
그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느냐가 그 사람의 값을 결정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누구나 백지 한 장 들고 태어나는지 모른다. 그 위에 의미 있는 인생을 그리라는 사명을 받고. 그러나 무엇을 그리는가에 따라 인생의 결국은 하늘과 땅 차이로 바뀌어지는지 모른다.

           삼성전자가 한국의 라이벌 기업인 금성사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의 이야기 한토막이다.
           어떻게 금성사를 꺾고 정상에 설 것인가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 결과를 가지고 올라온 부하 직원들에게 이건희 회장이 말했다.

우리의 경쟁상대는 일본이다. 일본의 도시바나 히다치와 같은 회사들과 경쟁을 해야지 국내 업체와 경쟁을 하려든다면 영원히 세계적인 기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삼성전자는 좋은 지도자 덕분에 좋은 그림을 그렸다. 국내 경쟁사를 죽이려는 본성을 이기고 세계를 그렸을 때, 지금 삼성전자는 세계적인 존재가 되어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양심 기업가로 엄지손가락에 꼽히는 최태섭 장로님이 계셨다.
           최장로님은 믿음과 양심으로 한국유리산업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으신 분이시다.
           한 번은 콩기름 수십 화차를 중국인들과 계약했다. 그런데 물건을 인도하기 전에 콩기름 값이 폭등하였다. 당시 돈으로 무려 30만원, 즉 쌀 6만 가마에 해당하는 값이 올랐다. 이 경우, 계약을 위약하고 위약금만 지불하면 다른 사람에게 팔아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받을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순종했다.
기독교인인 그는 '정직하게 사업하는 사람'이 되기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최장로님은 약속한 대로 그 콩기름을 중국인들에게 넘겼다. 당황한 쪽은 오히려 중국인들이었다. 그쪽에서 오히려 이익을 반반씩 나누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켰다. 하나님께서 그쪽에 기회를 주셨다고 믿었다.
           최장로님께서 6.25 전쟁 전에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으러 갔더니 은행이 폭격에 맞아 서류가 불타서 받을 수가 없다는 은행에 억지로 빌린 돈을 갚았다는 일화 또한 유명하다. .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그린 그의 인생을 늘 귀하게 지켜주셨다.
6,25때 있었던 일이다. 브루조아 기업가란 이유로 인민재판에 회부된 것이다.
과격한 노동자들이 최장로님을 처형할 기세였다.
"악덕 기업주의 재산을 몰수하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처형하라."
이렇게 외치는 사람들은 낯이 익은 사람들이요, 그가 사랑하고 아끼던 직원들이었다.
그는 그 순간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기가 막혔다
이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그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시면 하나님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어 평생을 살겠나이다."
"최태섭, 진노한 군중들을 향해 할 말이 있는가?"
외치는 그들에게 한 마디 했다.
"제가 여러분의 돈을 착취하고 나 혼자만 잘 살기 위해 살아왔다고 생각하면 주저 말고 돌을 던지십시오.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사랑 봉사 헌신을 실천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때, 공장 수위로 일하던 만주태생의 한 사람이 "의장!"하고 소리쳤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하지만 좀더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최 사장님이 우리에게 재판을 받을 만큼 죄를 지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이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어요."
이 말이 끝나자 "옳소, 옳소 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울음을 터뜨리는 여직원들도 있었다.
           좋은 그림을 그린 최장로님을 하나님은 살려주셨고, 한국유리산업을 일으키는 선구자로 사용하셨다. 그 안에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새긴 최장로님을  존귀히 사용하셨다. 그의 인생이 다하고 하나님의 심판대에 이를 때, 뭇 천사의 환영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고, 면류관을 쓴 자만이 다스릴 수 있는 나라에서 왕권에 참여하였을 것이다.
악한 영의 형상이 그 중심에 새겨 살다가 심판 날에 쓰레기 취급을 받을 인간들과 얼마나 다른가? 마침내 지옥 불에 던져질 악인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인생은 그래서 자기 그리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이여,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포도원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로 좋은 그림을 그리자.

믿는 자에겐 손가락 하나 바로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 / 노하덕칼럼


          2003년, 우리가 사랑하는 김병현 선수는 가운데 손가락을 관중을 향해 보였다가 얼마나 큰 부끄러움을 당했는지 모른다. 질이 떨어지는 관중 몇 사람이 야유하는 것에 화가  나서 가운데 손가락을 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그때 중지 대신, 엄지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더라면 김 선수는 역사에 남을 선수가 되었을지 모른다. 관중을 모독하는 것이 아니라 관중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손가락 하나쯤하고 아무 손가락이나 아무렇게 올리면 안된다.
우리 믿는 성도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는 것, 입 한번 여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더구나 자신이 존귀한 자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더욱 그런 습관에 익숙해져야 한다.

        어느 날 신문 기사를 보다가, 검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웃고 달려가는 한 사람을 보았다. 이 사람은 미국 플로리다 팀에서 주전 선수로 뛰고 있는 최희섭이란 야구 선수였다. 그는 메이져리그에서 홈런을 친 후, 홈런 세레머니를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 이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어야겠구나 마음을 정했다.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하기로 마음을 정한 까닭은 단순하다. 야구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홈런을 날린 선수가 수만 명이 바라보는 그 놀라운 순간 손가락을 하늘을 향해 가리킨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인가! 홈런을 날린 대부분의 선수들은 자기 감격에 겨우 껑충 껑충 뛰며 자기 자신을 나타내기에 바쁘다. '내가 홈런을 쳤다!' 환호하는 듯한 그 감격으로.
그러나 최희섭  선수의 홈런 세레머니는  특이하다.
'제가 홈런을 친 것은 저 높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극상품의 과실이라고 할 수 있는 홈런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홈런을 날릴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그를 위해 기도하고픈 사람이 나뿐일까?
'하나님, 최희섭 선수가 오늘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나와 같이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께 올려졌는지, 5월 1일자 신문을 보니까, 네 게임 연속 홈런을 날리고, 한달만에 총 9개의 홈런을 날렸다. 세계 제일의 홈런 왕 배리 본즈를 곧 추월할 기세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최선수를 보면서 하나님의 한 약속이 생각났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리라"라고.

사랑하는 이여,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삶의 현장에서 마음껏 홈런을 날릴 수 있도록 열심히 땀을 흘리자. 충성하자.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서 홈런이 터질 때, 극상품의 과실이 열릴 때 손가락을 바로 들자. 주인을 기억하자.
주인에게 돌려드려야 할 극상품의 실과를 구별하는 충성된 종처럼, 내 삶에 터지는 홈런의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자.

'하나님, 제가 오늘도 주님 덕분에 이런 홈런을 쳤습니다.
주님 덕분에 이 극상품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주님, 영광을 홀로 받으소서'
이런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책임지신다.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라.
하나님께서 나를 존귀히 여기실 것이다.

빛을 모으며 사는 사람 / 노하덕 칼럼


거울은 자신에게 오는 빛을 세상에 흩어  보낸다.
그러나,
돋보기는 자신에게 오는 빛을  받아 모은다.
그 모은 빛으로  에너지를 만든다.

지하 감옥에 갇혀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죄수가 있었다.
악한 죄를 지었다는 것이었다. 살 소망이 없었다.
그런데 그 절망적인 지하 감옥에 손바닥만한 햇빛이 비추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어디선가 날아온 꽃씨 하나가 돌바닥 틈새에서 뿌리를 내리고 그 햇빛을 받아 자라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물을 그 화초와 함께 나누어 마시면서 소중히 돌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 감옥을 순찰하다가 이 모습을 보았다.
그는 생각했다.
어린 꽃의 생명조차 이렇게 소중히 키우는 사람이 인간의 생명을 헤쳤을 리가!
그에게 자유의 문이 열렸다.

감옥에 비추인 햇빛을 소중히 받아 꽃을 키운 이 사람은 빛을 모으는 돋보기 인생을 산  것이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빛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도 선인이나 악인에 동일하게 비추신다.
재벌 회장이 아들에게 그 기업에  가서 일하라 일을 맡긴다면, 그 반응은 어떠할까?
노태우 전대통령이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을 받았을 때,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를 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포도원을 맡기셔도 감격이 없다.
여름날의 햇살처럼 쏟아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무심히 흘려 보낸다.
거울이 햇빛을 세상에 흩어보내듯
포도원에 부르신 아버지의 명령을 묵살하고 방치하던 맏아들같이.
그런 이들에게서는 열매가 없게 마련이다.
그가 비록 백성들의 장로나 제사장일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열매맺지 못한다.

그러나 '싫소이다' 등 돌렸던 둘째 아들이 돌이켜 아버지의 포도원에 가서 일한 것처럼 불순종의 자리에서 돌아오는 이도 많다.
저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소중히 모아 신앙의 불을 지핀다.
돋보기가 빛을 소중히 모으듯이.
사람을 살리는 에너지를 만든다.
하나님은 그들이 창기나 세리일지라도 저들 안에서 일을 이루신다.

누가 이 시대에 빛의 자녀로 나타나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모으는 자다.

버나드 로너간(Bernard J.F. Lonergan) 이라고 하는 신학자의 Method in Theology 라고 하는 책에서 회개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지성적 회개가 있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둘째, 도덕적 회심이 있다.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다.
셋째, 종교적 회개다.
주인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뜻을 생각한다.
거울처럼 하나님의 빛을 흩고 살아온 나의 지난날인가?
생각을 바꾸어 보자.
가치관을 바꾸어 보자.
주인을 바꾸어서 보자.
돋보기처럼 하나님의 빛을 모으자.

빛을 모으는 돋보기 인생은 거울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세상에 흩고 살아온 지난 인생의 생각과 가치관과 주인을 내려놓고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삶이다.

소리없이 열리는 열매 / 노하덕칼럼

 
         사무실 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베이큠을 찾았습니다. 아래층에 최신식 새 베이큠이 놓여 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전원을 넣자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베이큠이 힘차게  작동합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보니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번을 밀어도  베이큠이 지나간 자리에 조그만 종이 조각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요. '베이큠 도르래가 돌지 않나?' 점검해 보니 소리 못지 않게 힘차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베이큠이 지나간 카펫마다 온통 휘저어서 먼지는 온 방안에 가득합니다. 문제는 아무 것도 빨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한 베이큠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원 스위치를 끄고 다시 작동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 아래 또 다른 스위치가 있습니다. 이번엔 그것을 틀어보았습니다. 이건 조금 전 스위치와 달리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도르래가 돌아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청소가 됩니다. 아하, 이게 먼지를 빨아들이는 장치였습니다.
          이번에는 두 스위치를 모두 틀었습니다. 정상적으로 베이큠이 됩니다. 앞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도르래는 바닥을 온통 휘젓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스위치는 휘저어 일어난 먼지를 그대로 빨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원 스위치는 두 기능을 가능하도록 전원을 공급해 줍니다. 이 삼 요소가 합력하여 방안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이 베이큠의 원리가 우리 신앙 요소와 비슷합니다.
          요란한 소리를 내고 열심히 돌아가는 도르래는 무화과나무의 무성한 잎과 같습니다 . 예수님께서 열매에 대한 기대를 충분히 가지실 만큼 열심도 있습니다.
          전혀 소리가 나지 않지만 먼지를 빨아들이는 장치는 그 열매와 같습니다. 비록 요란한 모습은 없지만 잎보다 먼저 나와 주인을 감동시키는 그 무화과 열매 말입니다.
          그러나 이 두 요소가 기능을 발휘하려면 전원이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전원에 연결되는 순간 이 모든 기능을 살려주는 기도와 같습니다.

옥수수 박사님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김순권 박사님이  북한에 들어갔습니다. 좋은 옥수수 종자를 가지고 가셨습니다. 여러 언론에서 요란하게 떠들었습니다. 북한의 식량난은 이제 끝날 것처럼 잎이 무성했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열매는 신통치 않아 보입니다. 전해오는 말씀인즉, 잘 안된데요. 분명 좋은 옥수수 종자를 갔다 심었는데 잘 안된데요. 처음엔 잘 자라면서 굵게 올라오더랍니다. "아! 이거 됐다." 그랬더니, 얼마만큼 자란 다음, 결정적인  시간에 이삭이 안나오고 말더랍니다. 이유가 뭐냐 하니 "땅기운이 모자라서"랍니다. 그러면 비료라도 주어야 하는데 그것도 뒷받침이 안되니 옥수수가 안 된답니다.

땅기운, 이것이 중요합니다. 잎사귀도 좋고, 열매도 좋으려면 뿌리를 내리는 그 땅기운이 좋아야 합니다.  좋은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온 우주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바른 기운을 받아야 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요란한 잎사귀를 자랑하는 단계가 있습니다.
열매를 맺는 단계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말씀과 기도로 나의 인생을 접목시켜 보십시오.
나의 인생에도 봄이 오고, 아름다운 꽃과 잎들로 무성한 여름이 오고, 열매가 풍성히 익어가는 가을이 오게 마련입니다.

나는 지금  어떤 계단에 올라와 있을까요?

내 인생에 피어난 예수님의 부활 / 노하덕칼럼


마라토너처럼
먼 거리를  허우적거리며 달리고 또 달려오길 수십년!
잘 달린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 난 그렇게 좋은 경주자가 아니었습니다.
때로 경건치 않은 길로도 달려갔었고
때론 부끄러운 죄악의 길로도 미끄러져 갔었습니다.
이래저래 수없이 넘어졌고
정말 이제는 이 경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절망의 절벽에도 여러 번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 덫에 걸려  꼼짝달싹할  수 없는 어린양처럼
헐떡거리던 나의 통곡을 주님은 들으셨습니다.

그때,
제가 선 땅은 한나의 겨울처럼 꽁꽁 얼어붙었고
영하의 온도는 엘가나의 사랑처럼 고독했고
브닌나의  언어처럼 살 끝을 파고드는 찬바람으로 마른땅이 되어갔습니다.

그래도 부활하신 주님은 가시나무 같은 제 인생에 백합화처럼 피어있었습니다.
바람이 불어 제 가시가 흔들리노라면
채찍에 맞은 여린 살결처럼 주님의 몸은 찢기셨고
아플수록 더 진동하던 그 주님의 향기를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자랄수록 주님은 찔렸고
제가 강해질수록 주님께선 깨어졌으나
커다랗게 망울진 사명을
밤새워 이슬에 담아
온종일 소중한 꽃으로 터뜨리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찾아오셨던 그 부활의 주님께서
차갑고 슬프기만 한 저의 가슴에 기쁨을 가득 채워 주셨고
다메섹으로 가는 길까지 바울을 찾아오셨던 그 주님께서
강퍅해진 나를 천둥처럼 큰 소리로 깨우쳐 주셨고
디베랴 바닷가로 고기잡으러 갔던 제자들을 훈훈한 숯불로 데우셨던 그 부활의 주님께서
아시는 바대로
저의 식어가던 첫사랑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저는 절대로 부인하지 않을 겁니다 맹세하기를 여러 차례
결국은 하루 세 번씩 밥먹듯이 부인할 수밖에 없었던 저에게
새벽 닭 울음처럼 변함없이 가슴을 울려주셨습니다.

저는 늘 혼자라 생각하고 달렸었는데
알고 보니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늘 제 곁에 계셨습니다.

이렇게 경주하기를 계속하노라면
어느 날 저는 결승점에 서서 그 영화로운 면류관을 받게 될텐데
그날이 저에겐 지금부터 부담스러워 집니다.
지금 저의 경주가 보기에 따라서는 상당한 지점까지 온 것 같지만
이게 어디 제가 잘나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포기하고 싶었던 저를 격려하셨고
쓰러져가던 저를 부축하셨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저를 뒤에서 밀어 주셨고
두려움으로 멈칫거리는 저를 끌어주셨기 때문인걸요.
결국 나의 나되기까지 땀흘리시며 수고하신 분은 주님이신데
결승점에서 상은 제가 받아야 할 것이니
이런 송구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양도,
풍채도,
흠모할 만한 것도 없이
내대신 십자가를 지고 형장으로 나아가셨던 분은 주님이신데
영광의 면류관은 제가 받아야 한다니
이런 죄송한 경우가 있을 법이나 한 일 입니까?

세상에 비옥한 땅에서 지혜롭게 자라신 분들도 많은데
못 보신 듯 뒤로하고
마른 땅으로 굳어버린 내 인생에 찾아오신 생명의 줄기여!

오늘,
이 부활의 아침에
존귀와 영광을 홀로 받으소서
찬란한 나의 부활,
나의 생명이시여!

이장우 감독 'Love' / 노하덕칼럼

이장우 감독이 'Love'란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주인공은 국가 대표로 국제대회에 나가서 금메달을 따고, 또 오픈 카를 타고 영웅적으로 환영을 받은 유수한 마라토너인 명수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곁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은 Supporter가 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그와 함께 마라톤을 해온 친구입니다. 그는 명수보다 선수 자질이 뛰어나지 못해 아무리 뛰어도 명수를 뛰어 넘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릴 때부터 명수가 좋은 기록을  낼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해 뒤따라 뛰어 왔습니다. 그는 명수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동안 딱 한번 동메달을 목에 걸어보았을 뿐입니다. 
          그에게 희망은 죽을 힘을 다해 명수를 따라 달리다가 마지막 순간 딱 한 발자국만 앞서 결승점에 도달함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지는 날이 왔습니다. 그 유명한 마라토너 명수가 그의 Supporter가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포기하려드는 그에게 어깨를 빌려 줍니다. 쓰러져가는 그를  붙들어 줍니다. 그를 인도하여 결승점까지 리더해 갑니다. 그를 결승점 테잎을 끊게 하고 자신은 그 뒤에 우뚝 서 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한참 흘렸습니다. 내 인생의 경주를 붙들어 주시는 나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내 곁에서 뛰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포기하고 싶었던 그 순간에 붙들어 주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Supporter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내가 결국 이 믿음의 경주에서 면류관을 받게 되는 그날이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날에 내가 쓰게 될 면류관은 주님이 쓰셔야 할 영광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부활 주일 작품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기  위해  구상하던 중 이 ‘Love’란 영화에서 얻은 힌트를 기점으로 해서 완성한 것입니다. 

그분의 상처만 바라보라 / 노하덕칼럼


-하나-

사정없이 내리치는 채찍이 목과 등을 할퀴고
새빨간 핏자국이 동생 뱃시의 옷에 번지는 것을 보면서
언니 코리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놓았다.
자신이 라벤스부롴 유태인 포로 수용소에 있다는 것도 잊은 양
일하던 부삽을 들고 동생을 가격하는 간수를 향해 달려간다.
이 절대 절명의 위기를 직감적으로 알아챈 동생 뱃시는 코리를 결사적으로 껴안는다.

"언니, 주님만 바라 봐. 내 상처를 보지 말고."

내 상처,
사랑하는 사람의 상처를 바라볼 때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아픔을 느낀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맞으신 상처를 바라볼 때,
한없는 위로와 치유함을 체험한다.

무엇을 위한 신체검사였을까?
돌보지 않은 인간의 발가벗겨진 몸을 보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다.

"뱃시야, 그들은 예수님 옷도 볏겼단다"

살아 계신 주님의 고난에 연결된 인생은 이렇게 복이 있다.

누가 그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으랴!





-둘-


볼티모어의 한 호텔에 허름한 옷을 입은 고객이 찾아왔다.
호텔 측은 그 허름한 고객을 받아들이지 않고 돌려보냈다.
'우리는 일류 호텔에 걸맞는 손님만 받습니다'
그 다음날 신문에서 그 호텔측은 놀라운 소식을 읽었다.
허름한 차림으로 그 호텔을 찾은 분이 바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것이다.
귀한 부통령이 오셨으니 그분을 잘 맞아 좋은 교제도 나누고, 그분이 묵어간 간 방이라고 사진도 하나 걸어놓고 그랬더라면 그 호텔이 얼마나 더 빛이 났을까?

살아계신 주님으로부터 단절된 인생도 이렇게 서글프다.




-셋-



지난 주일에 있었던 일이다.
키보드가 작동이 되지 않는다.
기능을 잃었다.
전등엔 불이 화안히 켜 있는데
키보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성능이 괜찮고 최신 것인데
키보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알고보니 전원을 연결시켜주는 아답터 줄이 파손되어 있다.
줄을 새롭게 바꾸어 기능을 회복한다.
아름다운 찬양의 멜로디가 다시 가슴을 울린다.

나는 오늘 하나님께 연결된 인생인가?
한사코 유익한 세상 손님을 찾노라 두리번거리고
'나에게 필요한 분은 세상 것을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오늘도 주님은 고난을 받으신 왕으로 찾아오시는데
그분 기쁘게 영접하여
더 깊은 교제를 나누고 사는 인생인가?

비록 상했을지라도
그 은혜 안에 연결된 인생에겐 회복이 있다.

겨울을 사는 나그네에게 / 노하덕칼럼


한나의 겨울은 혹한이었다

자녀가 없었다.
아들은 커녕 딸도 낳지 못했다.
희망은 사라져가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

사랑한다는 남편 엘가나는 다른 여인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
브닌나는 한나를 격동함으로 절망을 가중시켰다.

한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였다.

이 슬픈 겨울,
한나는 어떡하면 종을까?

한나는 엘가나를 찾지 않았다.
엘가나는 한나의 슬픔을 이해하는 자상한 남편이었고,
한나에 대한 배려를 할 줄 아는 신사였다.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
괴로운 날에 위로할  줄 아는 너그러움이 있었다.
하지만
한나는 엘가나의 넓은 가슴에  그녀의  슬픔을 쏟아놓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떤 슬픔은 사람의  위로로는 해결될 수 없음을.

"그를 격동시키나"
원수 브닌나와도 다투지 않았다.
너무 마음이 아파 울었고 차라리 굶어버렸지만
스스로 강하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어떤 싸움은 하나님만이 이기게 하실 수 있음을.

사울같으면 신접한 여인을 찾았을텐데
발락같으면 발람을 찾았을텐데
한나는 엘리 제사장을  붙들고 호소하지 않았다

대신
한나는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리고 간절히 기도했다
고통을 하나님 앞에 쏟아 부으며  기도했다.
먹지 않고 한없이 약한  모습으로 기도했다.
여호와 앞에만 머무르며
오래오래 기도하였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소서


엘가나의 사랑을 얻자는 기도가 아니었다.
브닌나에게 복수하려는 기도가 아니었다.
일리 제사장에게 인정을 받자는 기도도 아니었다.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키자는 기도도 아니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는 기도였다.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서원하며 기도했다.
그녀의 최선을 하나님께 올려드렸다.

나를 생각하소서

그런데
놀라웁게도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셨다.

한나의 추운 겨울은 이렇게 극복되었다.
그의 인생에 모든 불은 꺼졌지만,
한나의 인생에 켜진 기도의 마지막 불씨가 겨울을 이겼다.

신앙의 거목
사무엘은 태어났고
한나의 인생엔 봄이 왔다.
망울져 기다리던 꽃들이 연이어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사무엘과 같은 거목은
긴 겨우살이 인생 한나와 같은 기도 속에서만 태어날 수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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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는 겨울이 긴 나라다. 여름이 긴 나라도 많는데 캐나다는 겨울이 길다. 11월부터 으시시한 눈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면, 3월이 다 가도 겨울옷을 선뜻  벗을 수 없다. 좀처럼 철수하려 하지 않는 캐나다의 동장군! 와! 때론  5월까지 그 위용을 자랑한다. 밤마다 밀고 들어오는 그의 집념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캐나다' 하면, 세상 사람들은 '살기  좋은 나라', 그렇게 생각한다.  겨울이 없는 열대의  나라도 많은데, 겨울이 긴 캐나다를 살기 좋은 나라라고 말한다.
           겨울의 길이가 그 나라의 가치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캐나다산 밀은 세계에서 최고의 양질로 알려져 있다. 토양이 좋아서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겨울이 길어서라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긴 겨울 내내 땅 속에 묻친 밀알이 양질의 밀을 키워내리란 생각이다.
    어느 날 나는 해밀턴에서 런던으로 가는 길에 어느 하키 선수의 이름을 딴 마을을 만났다.
그 선수는 무려 1000골 이상을 넣은 기록이 있는데, 앞으로도 그의 기록을 깰 선수는 없을 것이란 말을 들었다. 겨울이 긴 캐나다이기에 그런 인물 배출이 가능했지 않을까? 뜨거운 나라 이집트라면 수천년 가도 기대할 수 없는 겨울 나라의 특권이 아닐까?


겨울을 사는 나그네여
이 추운 겨울을 한 번 한나처럼 기도로 채우고 싶지 않은가?
기도는 절망적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지지 못했어도,
좀 부족해도
기도가 살아 있으면 살려주시는 손길도 있다.


한나를 생각하신 하나님께서
나도 생각해주시도록 기도하자
믿음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여호와께 속한 사람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태어나기까지
겨울엔 기도하자.

기다려지는 분 / 노하덕칼럼



그분이 기다려지고,
그분이 보고 싶고,
그분과 이야기 하고 싶고,
그 분만 함께 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그분만 생각해도 행복한
그런 왕을 모시고 있습니까?

그분이 원하신다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은
그분이라면 무엇인가 헌신하고 싶은
새끼가 어미로부터 떨어지지 않자 어미 나귀까지 내놓고 싶은
그분이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고 싶은
이런 왕을 모시고 있습니까?

메주는 원래 콩으로 쑤는데요,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이라면
그대로 믿고 싶은
어떤 말씀도 순종하고 싶은
그런 왕을 모시고 있습니까?

오늘 그런 왕께 당신을 초대합니다.
그분은 당신을 위해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놓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1630년, 영국 청교도들은 그런 왕을 섬기러 아메리카 땅으로 향하였습니다.  1000여명의 청교도들이 이 나무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마음껏 그 왕을 섬길 수 있는 자유를 찾아갑니다. 그때는 배를 탔다고 미국에 반드시 도착할 기약이 없는 때입니다.
   그때 청교도 지도자는 미국을 향해 출발하는 배 선상에서 왕  앞에서 언약 신앙을 선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왕, 하나님과 언약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우리의 왕, 하나님으로 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왕,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미국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우리의 목표 위에 행동을 취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에 맞게 살면,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땅, 피츠버그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왕 앞에서 선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약속 지켰음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이 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슴에 인치신 줄 알고 우리도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할 것입니다. 만일 언약에 맞지 않게 살면 이제부터는 우리 책임입니다. 그릇된 길로 나아갈 때,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실 것입니다.”

그들은 그 왕이신 하나님께서 언약을 지키신 기초 위에 그 백성들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를 이루어 감으로 언약을 지켜야 함을 선포했습니다.    
언약의 피를 나누는 성찬을 나누면서 언약을 세롭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초기 미국을 세우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코리 텐 붐과 벳시  두 자매는 유태인 수용소에 들어가서도 이런 왕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수용소 간수가 사정없이 내리치는 채찍이 동생의 목과 등을 할퀴고
새빨간 핏자욱이 동생 뱃시의 옷에 번지는 것을 보면서
언니 코리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놓았습니다.
자신이 라벤스부롴 유태인 포로 수용소에 있다는 것도 잊은양
일하던 부삽을 들고 동생을 가격하는 간수를 향해 달려갑니다.
이 절대 절명의 위기를 직감적으로 알아챈 동생 뱃시는
언니 코리를 결사적으로 껴 안는다.

"언니, 주님만 바라 봐. 내 상처를 보지 말고."

내 상처,
사랑하는 사람의 상처를 바라볼 때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아픔을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를 대신하여 맞으신 우리 왕의 상처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한없는 위로와 치유함을 체험합니다.

무엇을 위한 신체검사였을까요?
돌보지 않은 인간의 발가벗겨진 몸을 보는 것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습니다.
코리 언니는 그 비참한 순간에 대신  수치를 당하셨던 왕을 생각합니다.
"뱃시야, 그들은 예수님 옷도 볏겼단다"
살아계신 왕의 고난에 연결된 인생은 이렇게 복이 있습니다.

누가 이런 성도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왕,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볼티모어의 한 호텔에 허름한 옷을 입은 고객이 찾아왔습니다.
호텔 측은 그 허름한 고객을 받아들이지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우리는 일류 호텔에 걸맞는 손님만 받습니다'
그 다음날 신문에서 그 호텔측은 놀라운 소식을 읽었습니다.
허름한 차림으로 그 호텔을 찾은 분이 바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것입니다.
귀한 부통령이 오셨으니 그분을 잘 맞아 좋은 교제도 나누고, 그분이 묵어간 간 방이라고 사진도 하나 걸어놓고 그랬더라면 그 호텔이 얼마나 더 빛이 났을까요?

왕이 오셔도 살아계신 주님으로부터 모시지 못한 채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된 인생도 이렇게 서글픕니다.

오늘 그런 왕께서 당신을 초대합니다.
그분은 당신을 위해 생명까지 아낌없이 내놓은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님' 타령 / 노하덕칼럼


사람들이 왜 '예수님' 하지 않고, '예수' 하는 지 ......  

불신자들은 예수님을 특별히 '님'자를 붙일 만큼 공경하지 않으니까 그렇다 하자.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 그것도 잘 공경하고 예배까지 하는 신앙인들의 입에서도 '예수, 예수' 한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깍듯이 존중해 말씀하시는  분들도 예수님을 부를 때는 '예수가' 이런다.
언젠가 믿음이 좋은, 50년 이상 신앙생활을 했다는 권사님께 부탁드린 적이 있다.
권사님, 예수님이라고 '님'자 좀 붙이면 안될까요?
웬일인지 그분은 그 후로도 고치지 않으셨다.
아마 그 권사님은 천국에 가셔서 '예수님'이라고 고치실 것 같다.

물론 그렇게 부르시는 분들께는 하실 말씀이 있는 줄 안다.
Jesus란 이름에 무슨 '님'자가 붙느냐? 공자, 맹자, 석가모니, 간디, 링컨, 하지, 무슨 '님'자를 꼭 붙여야 공대하는 말이냐 할 수도 있다.
직분 뒤에는 '님'자 붙이는 것이 예의에 맞지만, 이름 뒤에는 '님'자를 잘 붙이지 않는다 할 수도 있다.
성경에도 '예수'란 단어에 '님' 자를 붙인 것 보았느냐 할 수 있다.
찬송가에도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이렇게 찬송하지 않느냐 할 수 있다.
예수님이 내 친구이신데, 예수님께 '님'자를 만붙인다고 무슨 흠이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겐 그런 것들이 영 흡족하지가 않다.

우리는 크게 내 놓을 것 없는 선생에게도 '님'을 붙여 '아무개' 선생님 한다.
집사에게도 '아무개'집사님 이렇게 부르는 것이 좋아 보인다.
장로에게도 '아무개'장로님 이렇게 부르는 것이 좋아 보인다.
권사에게도 '아무개'권사님 이렇게 부르는 것이 좋아 보인다.
목사에게도 '아무개'목사님 이렇게 부르는 것이 좋아 보인다.

하물며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내어주신 구주이신 주님께 냉철하게 '예수' 하는 것보다  '예수님'이라고 불러 드리면 더 좋지 않을까?
'예수님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이렇게 찬송 가사를 좀 고쳐 부르면 안될까?

그가 목회를 잠시 그만 둔 이유는! / 노하덕칼럼


           보기에 민망한 일들이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다.
           듣기에 민망한 말들이 여기저기 쏟아진다.
낯을 들고 다니기도 참으로 민망한 세상이다.
           그러나 민망한 일들을 민망히 여기는 사람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민망한' 일도 많고, 민망한 말도 많으나,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은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는 민망히 여기셨다고 말씀하신다.

바디메오와 같은 소경이 따라오면서 불쌍히 여기소서 외는 말을 들으셨을 때, 주님은 민망히 여기셨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이 할 수 있나이다 엎드린 문둥병자를 민망히 보셨다.
사랑하는 오빠를 죽음의 권세에 빼앗기고 슬퍼하는 나사로 누이들의 말을 주님께선 민망히 여기셨다.

영어 성경은 민망히 여기신다는 말씀을 'compassion'이란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요즈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을 제목과 주제로 다룬 멜 깁슨  감독의 영화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데, 그 수난(passion)이란 말은  주님께서 연약한 자와 고통을 함께 당하고 고통을 함께(com) 나눈다는 뜻일 수도 있다. 

바디메오란 시각 장애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셨다. 
온 몸이 문드러진 문둥병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셨다.
무덤 속에 사랑하는 사람을 묻고 상실감에 우는 고통을 함께 나누셨다.


얼마 전에 우리 동족이 쓴 글에서 상당히 공감이 가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어떤 사람이 뜻밖의 사고로 시각 장애인이 되었다. 
얼마의 적응의 시간이 기간이 지나고 나서 누군가 물었다. 
"시각장애인이 되고 나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무엇이었나요?"
"건널목을 건너는 일이었습니다."
신호등에 파란 불이 켜질 때마다, 맞은 편으로 사람들이 건너가는 횡단보도,
그러나 건강한 사람이 부지런히 건너가야 겨우 건널 수 있을 만큼 시간을 주는 횡단보도,
그 횡단보도 건너는 일이 가장 괴롭다는 것이었다. 시각 장애를 가진 분들은 겨우 반쯤 건넜는데 벌써 빨간 불이 들어오고, 피할 길도 없고, 달릴 수도 없는 그들은 꼼짝 없이 빵빵거리는 크락숀과 욕하는 운전사들의 폭언과 저주를 뒤집어 쓰고 남은 길을 건너가야 하는 것이다. 장애인이나 노인을 배려하는 마음이 그리운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장애인을 보실 때, 민망히 여기는 마음(compassion)을 가지고 계신다.

얼마 전 잘 나가전 목회를 중단한 목사님 한분이 Kittel이란 사람이 사전에서 본 이 민망히 여기는 마음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어린 새 한 마리가 찢겨 죽는 모습을 어미 새가 보았다. 처절하게 우는 그 어미 새를 잡아 그 창자를 해부해 보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어미새의 창자가 토막토막 나 있더란 것이다. 어린 새끼 새가 찢겨 죽는 모습을 모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자기 창자가 토막이 나도록 처절히 울었을까?

그는 목회를 그만 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예수님은 민망히 여기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며
그런 교인들의 고통을 보아도 이런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이제 목회를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말하기 민망한 말들을 스스럼 없이 쏟아내고, 
보기 민망한 일들을 주저하지 않고 행한다. 
듣기 민망한 말들을 희희낙낙 즐기며 듣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이 하시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에 앞서서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compassion)을 갖고 계셨다.
당시 사람들은 소경을 보면서도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보았지만, 주님은 그를 민망히 여기셨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게 될 인물로 그를 만나셨다.
그가 장애인이 된 것은 그 자신이나 그 부모의 잘못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저 하심이라" 는 관점으로 그를 만나셨다.

이런 민망히 여기시는 마음의 절정이 십자가 사랑이다. 

마음만 나누신 것이 아니라 몸으로 그 아픔을 나누신 사건이 십자가의 사랑이다.
우리가 죄로 인하여 지옥에서 당해야 마땅한 수난(The Passion)을 함께(com)하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고난이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민망히 여기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할 고통을 함께 당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연약한 죄인의 눈물을  compassion하셨다.
십자가에서 민망히 여기셨다.


그 결과는

"곧 보게 되었더라"는 것이다.

거인으로 만드시는 하나님 /노하덕칼럼


역사를 따라 걷다보면, 때로 그 시대에 찬연히 빛난 거인을 만난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이토록 아름다운 거인을 만들었을까?
물론 하나님이시다.
거인은 되자고 해서 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사랑 속에서 자라게 마련이다.

          당대 최고의 궁중 교육으로 무장된 불혹의 나이에, 모세는 거인 될 꿈을 안고 일어났다. 동족을 구원하리라 열정을 갖고 일어났다. 하지만 거인이길 원했던 그의 꿈은 살인자란 오명만 남겼다. 누가 봐도 소인인 채로 쓸쓸히 미디안 광야로 숨어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광야로 모세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를 구원의 도구로 부르셨다.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던 그였지만, 그는 이내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는 거인 되었다.
그러고보면 거인은 하나님이 만드신다.

          갈릴리 바다의 어부들을 크게 본 사람들은 없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며 살다 죽어갈 소인들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을 때, 그들은 거인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부활의 권능을 입은 영적 거인이 되었다.
거인은 하나님이 만드신다.

          유대인들이 버린 막달라 마리아, 그 외롭고 비천한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 거인으로 변화되었다.
          늘 목이 마르던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영적으로 버려진 사마리아 사람들을 복음화시키는 영적 거인이 되었다.
소외된 그늘 인생 가운데서 거인을 만드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운 분이시다.

          마가는 거인 되길 원했다. 사도 바울은 그를 동역자로 삼아 함께 선교지로 떠났다. 그러나 마가는 여행 중,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소인이었다. 믿음의 거장 바울도 마가를 포기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버린 마가를 거인으로 키우셨다. 바울이 훗날 옥중에서 마가를 데려오라 편지에 쓸 만큼 소중한 거인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거인 만드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거인은 희생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다.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이야기다. 아파트 1층에서 불이 났다. 큰불이었다. 불이 건물 2,3층으로 옮겨 붙고 있었다. 4층 위쪽에 사는 사람들은 타오르는 불로 길이 막혔다. 아직 피신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4층에 세 아이를 돌보고 있던 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렸다. 아버지는 불을 피해 옆집 아파트 베란다로 뛰어 넘어갔다. 마침 옆집 베란다와의 거리는 불과 1미터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뛸 수 있는 거리를 아이들은 뛸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동동거리고 있는 자기 집 창문을 붙들고 엎드렸다. 두 집을 잇는 다리가 되었다.
"얘들아, 빨리 아버지 등을 타고 건너라"
아이들은 조심스럽게 아버지의 등을 타고 건넜다. 세 아이가 모두 건넜다.  아버지가 일어서려는 순간 기둥이 무너지면서 집이 내려앉았다. 아버지도 함께 떨어졌다.




            토론토 영락 교회 이석환 목사님께서 오늘 아침,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큰 사람이 높은 곳으로 가셨다. 그러나 참 놀랍고 큰 충격이다. 그릇도 크고, 마음도 넓은 , 그래서 꼭 우리 곁에 있어야 할 분인데, 내가 보기엔 우리 중 가장 오래 남아서 쓰임을 받으셔야 할 분인데, 이렇게 급히 가시니 마음이 참 아프다.
           영락 교회 이석환 목사님을 먼저 보내고 이런 거인이 생각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체구도 거인이 아니고, 연륜도 너무 젊으신 분인데, 그분이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거인을 생각하게 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분이 큰 교회의 담임을 하신 분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분을 만나 온 지난 10여 년, 이 목사님으로 인하여 몇 차례 점심을 접대 받은 일 때문도 아니다.
           만날 때마다 그분께 받은 사랑이 컸기 때문이고, 마음이 참 넓었다는 추억 때문이다. 이목사님께서 희생을 통해 영락 교회 교우들을 섬겼고, 토론토 교계와 하나님의 나라를 섬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는 큰 사람이었다. 마음이 컸고, 그릇이 큰 사람이었다.
           영락교회 하면 한국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만 거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토론토에는 거인 이석환 목사님이 계셨음을 알리고 싶다. 고난 절을 앞두고 부름 받은 하나님의 뜻을 기리고 싶다.
           그분이 섬기던 토론토 영락 교회와 이석환 목사님의 유족을 위해 기도한다

나의 마중물을 주님의 펌프에 부으며 / 노하덕칼럼


때로
나에게는
타는 목마름이 있다.

기업가에게 돈을 향한 목마름이 있듯이
정치가에게 권력을 향한 목마름이 있듯이
스포츠인에게 파워를 향한 목마름이 있듯이
때로
나에게는 영적 목마름이 있다.

마중물 한 바가지
기다리는 펌프의 목마름을 생각하며
나의 마중물을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목이 마르신 것을 기억하며
모든 피와 물을 쏟아버리셨기에
목이 타셨던 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딱 일곱 마디 남기신
그 유언을 되새김한다.

아침 묵상 시간을 부으며
마중물처럼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조그만 물질을 마음에 담아 바치며
나의 마중물을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예배를 올리며
나의 마중물을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나의 존재란
모아보아야 한 바가지 물에 불과하지만
주님의 펌프에 부으며
주님 안에 넘치는 영원한 생수를 내 삶에 기다린다.
명절 끝날까지도 목마른
나의 목마름이
주님 안에서 솟아난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이길 바라며
나의 마중물을 예수님의 펌프에 붓는다.

Wednesday, 29 April 2015

옛 사람 지워가기 / 노하덕칼럼




하와이 컨퍼런스에 다녀오신 분이 은혜를 받았다 하신다.
'회개란 생각을 바꾸는 것이었다고......  .
생각이 바뀌니 삶이 바뀌더라고.'

회개란 더 좋은 것을 기록하려고 덜 좋은 것들을 지우는 것이다.

나에겐 6Gb의 용량을 가진 컴퓨터가 있다.
그런데 때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타이핑이 잘 되지 않는다.
그 이유를 알았다.
불필요한 내용이 가득 자리잡고 있단다.
과감히 절반을 지워버렸다.
내게 꼭 필요한 내용만 남기고.
얼마나 기능이 활발해졌는지......  .
얼마나 속도가 빨라졌는지 모른다.

우리 인생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세상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내면에 가득할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기능이 마비된다.

예수님께선 우리 인간의 기능을 회복시키시는 분이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한다.

성경에는 죄로 인하여 기능을 상실한 사람 사람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빛이신 하나님을 만나 기능을 회복한 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삭개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그 시대의 모든 유대인이  포기한 자였다.
민족을 잃어버리고 자기조차 잃어버린 채,
자기 연민의 벽에 갇혀 살던 자였다.
로마에 속하여, 로마법을 지키며, 로마에 충성하며 로마인처럼 살았다.

주님께서는 그를 찾아 오셨다.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시던 분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리고 그의 문을 두드리셨다.
여리고의 짙은 어두움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으나
하나님은 삭개오를 위해 뽕나무를 마련해 두셨다.
삭개오는 그 나무에 올라 참 빛을 영접하였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보듬었다.

주님은 회개한 그의 내면에서 죄를 씻어버리셨다.
자녀로서의 기능을 회복시키셨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던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
주께 속하여
주의 법을 지키며
주께 충성하며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셨다.

제 기능을 회복하게 되니
아브라함 자손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되고보니
그를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되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은 말한다.
나는 키가 너무 작다고
환경이 나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삭개오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아브라함 자손으로서의 내 기능이 살아났다고.

장애가 있더라도 삭개오처럼 뽕나무를 찾아라.
다락방 모임을 통하여 예수님과 만나라.
성경 공부를 통하여 예수님을 체험하라.

우리 민족은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예수님을 만났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기회를 찾는 삭개오에게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고
참된 회개로 결단한 그를
아름다운 작품으로 만드셨다.
사람들이 버린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가장 자랑스러운 자손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삭개오는 믿음으로 부자 관원이 넘지 못한 벽을 넘고
그의 금고는 세례를 받았다.
           그는 오늘도 천국 문 입구에 서서 외친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부자 관원조차 포기하고 돌아간 그 부의 벽을 훌쩍 넘은 삭개오를 다독이시는 주님의 말씀
           인자(人子)의 온 것은 잃어버린 널 찾아 구원(救援)하려 함이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쁘단다.

큰 파도가 밀려오면 작은 파도는 밀려가는 것처럼
큰 은혜가 파도처럼 밀려오면 세상의 지저분한 죄악들은 씻겨가게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는 큰 파도처럼 밀려온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깨닫게 하시는 진리는 소낙비처럼 쏟아진다.
그 크고 놀라운 은혜와 진리를 담는 과정이 회개다.
우리는 그때마다 지금까지 담아둔 작은 파도를 지운다.
더 크고 좋은 파도를 적기 위해서
쓰레기가 되어 있는 많은 생각을 지운다.
그리고 그 위에 밀려온 은혜를 새로이 적는다.
이런 반복을 통해 좋은 작품이 이루어진다.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생각나는 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옛 사람을 지워가야 하는가!
주님의 뜻이 내 삶에서 이루어지기까지
고집스럽고, 변화되기를 싫어하는, 그러나 스스로 잘나고 왕 노릇하고 싶어하는 교만을 얼마나 지워야 하는가!
그러고 보면
진정한 회개란 더 좋은 것을 기록하려고 덜 좋은 것들을 지우는 것이다.
옛사람에 속한 것을 지워버리고 속 사람을 계속 써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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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는
그녀를 위해 예비된 구원을 가볍게 여기고
떠나선 안될 땅을 떠났다가
하지 않아도 될 방황을 많이 했다.
깨버리면 안될 언약을 깼다가
잃어선 안될 소중한 것들을 잃었다.
잃어선 안될 남편을 잃었고
잃고 싶지 않던 아들들을 잃었다.

그 일로 인하여 우리는 또한 행복했다 / 노하덕칼럼


나를 전도사로 처음 청빙한 교회는 프랑크푸르트 장로교회다.
주일 예배에 50명이 채 되지 않는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 예배와 교육이 내 몫이었다.
어느 남자 집사님이 조그만 매를 뒷짐에 들고 문 앞에 서서 어린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었다. 어른 예배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되겠고, 또 어린 아이들이 어른 보호도 없이 밖에 나 다니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이겠지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아이들에게 예배는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게 책정한 사례비는 매월 200마르크였는데, 당시 미화로 $100 조금 더 되는 돈이었던 것으로 생각이 든다. 그 교회까지 가는 차비(약 100Km)와 헌금을 제하고 나면 얼마가 남는지 몰랐다. 아무튼 나에겐 돈보다 나를 찾아와 불러 주신 일이 정말 고마웠다.
나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님 앞에 옳다함을 얻은 것만도 감사한데
그분의 포도원에서 마음껏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돈을 내고서라도 얻고 싶은 포도원이었다.
그런데 사례비까지 준다니 더욱 감사한 일이 아닌가?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간은 주일이 되어 교회에 가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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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드리고 분반 성경공부를 하자면, 동역하는 교사가 필요했다.
찬양을 반주할 반주자가 필요했다.
길길이 뛰는예배에 길들여지지 않은 아이들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부모님들의 형력도 필요했다.
그러나 많지 않은 교인 가운데서 교사를 내려 보내달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도하기로 했다.

성범용 선생님 내외분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어학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만난 분인데, 처음이야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시간을 쪼갰지만, 이내 신앙의 불이 붙기 시작했다.
이보은 선생님은 목사님의 따님이셨는데 피아노 반주는 물론 아이들에게 찬송을 능숙히 지도하는 훌률한 교사였다.
김지갑 선생님은 나와 같은 Giessen이란 도시의 대학 도서관에서 만난 분인데 겉모습의 우람함과는 달리 매우 자상하여 어린이 지도에 마음이 깊었다. 그분은 내 차가 없는 동안에 그 먼길 운전을 많이 해 주셨다.
교우들의 협력은 대단했다.
이런 교사들이 마음껏 봉사하도록 유지선 부장 집사님의 배려는 감동적이었다,

주일학교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가끔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밤이 깊도록 나눈 우리의 모든 기도는  놀랍게도 바로바로 응답이 되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깨달은 사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이들이 아버지께 나아오는 것을 기뻐하시는구나.'
그래서 우리는 또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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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우리에게 많은 기쁨을 준 사건은 주일학교에서 당시 감비아로 선교차 떠나던 유병국 유보인 선교사를 후원하기로 한 일이다. 한 주일에 한번씩 금식을 해가면서 모은 돈을 선교지로 보낼 때의 기쁨은 참 컸다.
'김치하나도 포기 못한 선교사'란 책에 그분의 진솔한 성품과 사역이 소개되어 있거니와 유병국 선교사님을 그곳에서 만나고 그분의 선교에 동참하게 된 일로 인하여 우리 모두는 참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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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그때 시작된 유병국 선교사(지금은 10년 아프리카 사역을 마치고 한국 WEG지부장으로 계심)와의 만남을 축복하셔서 20년이 다 된 오늘까지도 계속하게 하시니 또한 감사하다.
               

우리는 기도만 하고 교육만 한것은 아니었다.
때로 우리는 서로를 초청하여 소풍을 나갔다.
유집사님은 그때도 굉장한 음식 솜씨로 우리를 놀라게 하였지만
그만한 수준을 넘나볼 수 없는 사람들도 없는 솜씨를 발휘하며 기쁨과 감사를 나누었다.
그 일로 인하여 또한 우리는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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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했던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영생은 상급이 아니다. / 노하덕칼럼


    어제 저녁, 중고등부 모임을 마치고 나오는 아들 위로의 인사가 90도다.
'아, 위로가 이 모임에서 은혜를 받았구나!'
은혜를 체험하면 고개가 숙여진다. 은혜를 체험하면, 허리가 굽어진다. 겸손해진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는 길에 위로가 한 마디 한다.
"아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나는 들림을 받을 수 있을까요?"
"너 예수님께서 너를 위해 죽으신 사실을 믿지 않니?"
"믿지요."
"그렇지만, 내가 가진 믿음이란 것이 무엇인지 좀더 깊이 생각해보아야겠어요."

        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나는 무엇을 말해주어야 하나?

       여기 한 젊은이가 있다.  그는 좋은 집에 살고 있다. 그는 좋은 옷을 입고 있다. 좋은 음식을 차린 상에서 먹고 지낸다. 사람들은 그를 부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실 그는 모 기업체 회장님께 6천만 달러나 되는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는 이 빚을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2년 동안 최선을 다해 50,000달러의 돈을 모았다. 정말 기뻤다. 그 돈을 들고 주인을 찾아간다. 그리고 주인에게 말한다.
        "회장님,  지난 2년 동안 회장님의 빚을 갚기 위해 불철주야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이만큼 돈을 모았습니다. 이 돈으로 왕께 진 빚을 갚고자 합니다. 아직 부족하지요?"
        회장님은 그 젊은이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말한다.

        "자네 정성이 참으로 지극하구먼. 그렇지만 자네가 갚아야 할 빚은 6천만 달러네. 그런데 자네는 5만 달러를 갚았으니 5,995만 달러가 남았네. 그러니 자네 힘으로는 일 백 번을 죽었다 살아나도 나에게 진 빚, 6,000만 달러를 다 갚을 수는 없겠네. 그러나 자네가 꼭 자네 힘으로 내 빚을 갚고 싶다면 해답을 한 가지 말해주겠네. 자네 가진 재산이 얼마가 되나?"
'10만 달러쯤 됩니다."
"그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게. 그래도 자네가 내게 갚아야 할 빚은 5,985만 달러가 남는구먼. 이자를 전혀 계산하지 않더라도 말일세. 만일 자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를 준다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킨 셈이네. 그러고도 남은 빚을 더 갚고 싶다면, 자네는 내게 와서 일평생  내 회사에서 일하며 비서로 나를 위해 일하게. 그러면 내가 자네를 빚이 없는 사람으로 인정해 주겠네."

        그 젊은이는 슬펐다. 그것은 불가능하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가진 재산을 팔아 은행에 넣어두라는 것도 아니고, 가난한 자에게 다 주어버리라니, 그리고 평생 종노릇하며 살라니 될 법이나 한 일인가? 그 회장의 말씀대로 실천할 수가 없었기에 슬펐다. 그렇다고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그 빚을 다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또한 슬펐다.
        뒤돌아 오는 그의 눈에 비만한 닭 한 마리가 창공을 향해 솟아오르다가 이내 땅으로 내려앉는 모습이 보였다.
'왜 저 닭은 도요새처럼 힘차게 창공을 날 수 없을까? 닭은 도요새보다 날개도 훨씬 큰데.'
가진 재산이 많아 얼른 포기할 수 없어 세상으로 돌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몸이 무거워 이내 땅에 주저앉고 마는 닭의 모습과 겹쳐지고 있었다.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의 모든 선한 노력도 내 힘으로 빚을 갚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구나.'
        그에게 답이 열리고 있었다. '내가 부모님께 진 빚만 갚으려 하여도 불가능한 일인데 무엇으로 하나님께 진 빚을 내 힘으로 갚고, 또 그 대가로 영생까지 얻는다는 말인가? 주님 앞에서 내가 행한 선을 가지고 영생을 얻으려는 계산은 아예 하지 말아야지.'
         영생은 선한 일을 행한 자에게 주는 상급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선물이다. 살아 계신 부모의 자녀에게 생명이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처럼, 살아 계신 주님 안에서 거듭난 자녀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생을 선물로 주시길 원하신다.
           2천년 전, 하나님께서 내 구원을 위해 갈보리 산 위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실 때, 나는 무엇을 행하였나?
          주님께서 나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사랑하는 외아들을 산 제물로 내어놓으실 때, 나는 주님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 한 번 닦아드린 적 없다. 타는 목마름으로 주님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닥다니'를 외치실 때, 물 한 방울로 그분의 혀에 적셔드리지 못했다. 주님은 나의 빚을 갚기 위해 온 몸을 찢기시고 피를 다 쏟으실 때, 나는 정말이지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 때, 존재도 없었으니까.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속에 태어났을지라도, 나는 죄를 지었을 뿐이고, 연약했을 뿐이고, 경건치 못한 삶을 살았을 뿐이다.
        주님께서 외아들을 내어 주심으로 일만 달란트를 대신 지불해주시고, 나에게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갖게 하신 것은 하나님만 행하신 한량없는 은혜였다.
        나는 일만 달란트짜리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소중히 품에 간직하고,  그 사실을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자. 내 주변의 500데나리온 빚진 자가 있으면, 그들의 멱살을 잡으려 하지 말고,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신 것처럼 나도 용서하면서 살자.
        '사실 나도 일만 달란트를 빚졌던 자인데 왕께서 내 빚을 대신 지불해 주었다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자네에게 500데나리온을 빚을 기어이 받겠다고 자네의 멱살을 잡을 수 있겠나?'
이렇게 용서하면서 살아야지.

        사랑하는 아들아,
네 홀로 힘쓰고 애써서 저 높은 하나님 나라까지 오르려 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너의 삶에 주님으로 모셔들여라. 그분이 너를 안아 천국으로 들어 올리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해 2천년 전에 준비해두신 선물, 영생을 받아들여라.
네가 잘 암송하고 있는 요3:16에는 이런 말씀이 있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